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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민주주의 주체’ 민중인가 시민인가

등록 2008-02-27 20:49

‘석학 인문강좌 시리즈’ 토론회
지난해 진보 학계에서는 민중담론 부활론이 제법 힘있게 제기됐다. 우석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신자유주의 일반화가 생존권에 기반한 민중들을 양산시키고 있으며 이런 추세는 가속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도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 체제 희생자들이 민중의 이름으로 전면적이면서도 세계적 규모의 저항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외환위기 이후 시민에 자리를 내어 준 민중이 돌아오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민중운동의 사회적 역할 고갈 시민권 정착·정당정치로 가야
현실선 ‘모두가 시민’ 불가능 노동자등 배제돼 희생자로
사회적 시민권 실현정당 위해 사회운동 출현의 필요성 절실

민주주의의 실질적 진전을 이룰 주체는 민중인가 아니면 시민인가? 지난 23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이 주최한 토론회의 주제이기도 했다. 이 행사는 학진 주최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시리즈’의 4번째 강연자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민중에서 시민으로’ 주제 강연을 정리하는 마당이었다.

최 교수는 민주화 이후 운동이 아닌 정당 정치의 활성화만이 민주주의 확장의 요체라는 견해를 보여 왔다. 그는 토론회에 앞선 강연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주체는 “민중에서 시민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민중운동 담론은 그 자체 안에 “멀지 않은 장래에 빠르게 해체될 수밖에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민중운동 담론은 이념이나 가치정향에 있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총체적 비전, 도덕주의, 낭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장주의 등을 그 내용으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현 가능한 개혁 대안을 찾기 힘들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런 이유로 민중 대신 시민과 시민권의 개념을 제대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다. 왜 시민인가? 최 교수는 시민과 시민권의 핵심 원리는 “보편성의 원리”라고 했다.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자유와 권리는 공동체의 성원인 개인들에게 보편적이며 평등하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시민의 출현은 민중운동이 주도했던 민주화의 결과물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시민권 획득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최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영국 사회이론가 T.H.마샬의 논의를 옮겨 시민권은 시민적 권리(18세기)와 정치적 권리(19세기), 사회경제적 권리(20세기)로 누적적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최 교수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점이라면서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핵심적 요인”이라고 밝혔다. 그가 사회적 갈등 균열에 대응하는 정당체제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권의 진전을 위해서는 시민-유권자의 삶의 현실에서 나오는 요구가 정당 정책대안의 근본적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토론자로 나선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최 교수의 이런 관점을 ‘본질주의적 의회주의’로 규정했다. 그는 최 교수의 ‘근대적 시민’ 관념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자본가계급 헤게모니 아래서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배타성을 생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노동자 계급과 제3세계, 주변부 또는 각종의 소수자들이 ‘배제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시민이라는 입장, 혹은 ‘민중=시민’론은 일종의 유사 보편성이며 관념적 보편성일 뿐 실제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에서는 그런 ‘보편적 시민’은 존재하기 힘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 교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는 탈근대론자들도 근대적 시민 개념에 우호적이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들이 ‘시민’ 개념 속에 포함된 부르주아적 가짜 보편주의에 적대감을 보이면서, ‘소수자’나 ‘노마드’ 등 ‘시민’ 범주에 포획되지 않는 주체를 설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토론자인 강정인 서강대 교수는 “운동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고갈됐다”는 최 교수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했다. 강 교수는 사회적 시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정당의 출현을 위해서라도 사회경제적 균열에 따른 사회운동의 출현이 적극 요망된다고 밝혔다. 그는 노동에 대한 불온시 등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유산 때문에 사회적 시민권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지 않고 있다면서 사회운동의 출현이 정당 출현을 위한 촉매로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정치적 시민권을 얻은 뒤에도 사회적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오랜 시간에 걸친 투쟁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자신은 평등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현실주의적 요소를 중시하고 있다면서, 민주주의 제도로는 민중 민주주의 경제 체제를 만들 수 없으며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은 그 체제를 개선하고 개혁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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