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
장정일의 책 속 이슈 /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
이옥순 지음/푸른역사/1만3000원 조선이 일제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1920년~40년 사이, 인도는 열화와 같은 주목을 받았다. 민족언론을 표방했던 그 시절의 어느 신문은 1921년 한 해 동안만 무려 150건을 상회하는 인도 관련 기사를 실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물질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주의의 성지로 인도를 전유하기 훨씬 이전에, 조선의 ‘인도 붐’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이옥순의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푸른역사, 2006)는 80여년 전의 ‘인도 붐’에 대한 흥미진진한 보고서다. 식민지 조선에서 인도가 빈번히 언급되고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먼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게 약자와 희생자로서 유대감을 느끼게 했다. 나아가 간디를 비롯한 인도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은 독립을 희구하는 조선인들의 귀감이면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빌려 대중들에게 조선의 독립운동을 드러내놓고 선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도 독립운동가들이 벌인 스와라지(자주)와 스와데시(자급자족) 운동은 무력한 조선 민족운동의 모범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간디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됐다. 1930년 간디가 영국의 소금 전매법에 항거하여 ‘소금행진’을 했을 때 국내 신문은 23일 동안 날마다 그 행진을 따라가며 보도할 정도였고, 조선의 민족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비폭력 운동의 방법적 적실성 논쟁이 덩달아 벌어졌다. 이렇듯 인도를 통한 우회적인 말하기를 통해 조선인이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을 전파할 때, 일본이 보여준 반응은 역설적이다. 인도의 반영투쟁이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동양을 지켜야 한다는 일본의 대아시아주의 논리를 정당화해주었기 때문에 인도 관련 기사는 은유적 심각성이 있음에도 대체로 검열을 통과했다. 근래에 전개된 티베트 사태에 대해 한국 언론이 동정적인 데 반해 북한은 폭도라고 비난했듯이, 타자의 재현은 항상 정치적이다. 그 시대에 인도가 자주 운위된 또다른 이유는 인도가 피식민 처지에 빠져 있던 조선의 열등감을 희석해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은 우리보다 못난 “또다른 동양”을 창출함으로써 거세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했고, 때문에 인도는 상고시대의 문명을 그대로 간직한 역사 없는 나라, 물질적으로 뒤떨어진 초세속적인 나라로 웃음거리가 됐다. 바로 그런 시각이야말로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을 당대의 조선인들은 짚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알고 있을까? 같은 지은이의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푸른역사, 2002)은 유명 종교인ㆍ문인ㆍ여행가가 쓴 최근의 인도 관련 저작 속에서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인도 이미지’를 분석한 바 있다. 식민 지배를 벗어버린 오늘의 한국인들은 80년 전의 이중적 태도보다 더 내재화된 ‘복제 오리엔탈리즘’을 갖고 있으며, ‘우월한 서양’적 시각으로 ‘열등한 동양’을 바라보는 데 길들여져 있다.
장정일 소설가
이옥순 지음/푸른역사/1만3000원 조선이 일제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1920년~40년 사이, 인도는 열화와 같은 주목을 받았다. 민족언론을 표방했던 그 시절의 어느 신문은 1921년 한 해 동안만 무려 150건을 상회하는 인도 관련 기사를 실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물질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주의의 성지로 인도를 전유하기 훨씬 이전에, 조선의 ‘인도 붐’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이옥순의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푸른역사, 2006)는 80여년 전의 ‘인도 붐’에 대한 흥미진진한 보고서다. 식민지 조선에서 인도가 빈번히 언급되고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먼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게 약자와 희생자로서 유대감을 느끼게 했다. 나아가 간디를 비롯한 인도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은 독립을 희구하는 조선인들의 귀감이면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빌려 대중들에게 조선의 독립운동을 드러내놓고 선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도 독립운동가들이 벌인 스와라지(자주)와 스와데시(자급자족) 운동은 무력한 조선 민족운동의 모범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간디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됐다. 1930년 간디가 영국의 소금 전매법에 항거하여 ‘소금행진’을 했을 때 국내 신문은 23일 동안 날마다 그 행진을 따라가며 보도할 정도였고, 조선의 민족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비폭력 운동의 방법적 적실성 논쟁이 덩달아 벌어졌다. 이렇듯 인도를 통한 우회적인 말하기를 통해 조선인이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을 전파할 때, 일본이 보여준 반응은 역설적이다. 인도의 반영투쟁이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동양을 지켜야 한다는 일본의 대아시아주의 논리를 정당화해주었기 때문에 인도 관련 기사는 은유적 심각성이 있음에도 대체로 검열을 통과했다. 근래에 전개된 티베트 사태에 대해 한국 언론이 동정적인 데 반해 북한은 폭도라고 비난했듯이, 타자의 재현은 항상 정치적이다. 그 시대에 인도가 자주 운위된 또다른 이유는 인도가 피식민 처지에 빠져 있던 조선의 열등감을 희석해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은 우리보다 못난 “또다른 동양”을 창출함으로써 거세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했고, 때문에 인도는 상고시대의 문명을 그대로 간직한 역사 없는 나라, 물질적으로 뒤떨어진 초세속적인 나라로 웃음거리가 됐다. 바로 그런 시각이야말로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을 당대의 조선인들은 짚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알고 있을까? 같은 지은이의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푸른역사, 2002)은 유명 종교인ㆍ문인ㆍ여행가가 쓴 최근의 인도 관련 저작 속에서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인도 이미지’를 분석한 바 있다. 식민 지배를 벗어버린 오늘의 한국인들은 80년 전의 이중적 태도보다 더 내재화된 ‘복제 오리엔탈리즘’을 갖고 있으며, ‘우월한 서양’적 시각으로 ‘열등한 동양’을 바라보는 데 길들여져 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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