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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갈라진 상처, 만날 수 없는 구원

등록 2008-04-04 23:02

〈당신의 첫〉
〈당신의 첫〉
〈당신의 첫〉
김혜순 지음/문학과지성사·7000원

김혜순씨의 아홉 번째 시집 <당신의 첫>은 분열의 기록이다. 시집 어느 곳을 펼쳐 보아도 시인은 분열된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신음하고 방황한다.

“내 불가살은 저 태평양에 두고/ 내 뻐꾹새는 저 티베트에 두고/ 내 나무늘보는 저 아마존 밀림에 두고/ 밥하고 강의하고 이렇게 늙어간다”(<불가살> 부분)

시인은 “양파처럼 다 벗겨지고 나니 나는 없는데/ 나를 나라고 부르던 나는 어디 숨어 있었던 것인지”(<양파>) 좌절하거나, “아무래도 나는 나를 다시 죽이러 가야겠다”()고 갱신과 신생에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자아의 분열과 실종, 나아가 (상징적) 살해로까지 이어지는 고통이 ‘여자라는 원죄’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아래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세상 구멍으로 태어났으니 또다시 구멍을 낳으라 그러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용서를 빌지 않고는 이 세상 넘어갈 수 없다하네 무릎꿇으라하네 벌레처럼머리를조아리라하네 두손으로싹싹빌라하네 낮추고낮추라하네 무릎을꿇고오줌발을받으라하네 가슴을치며회개하라하네”(<꽃잎이 피고 질 때면> 부분)


그래서 김혜순씨의 시집에서는 “여자가 운다”(<붉은 노을>). 여자는 구멍과 가위(<붉은 가위 여자>), 그리고 사이(<지평선>)의 존재. 가위는 상처를 내고, 사이는 상처의 다른 이름이며, “이 삶은 오직 찢어진 구멍으로 엿보는 저 머나먼 것일 뿐”(<핑크박스>)이다.

이렇게 갈라지고 암울한 세계에서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이 바로 시집 제목으로 쓰인 ‘첫’이다. ‘첫’은 분열과 상처가 발생하기 전,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나와 당신이 하나였던 상태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첫’은 이미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첫>)이다. 그렇다면 이 시집은 타락과 몰락의 노래라 할 수 있겠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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