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시인
500쪽 넘는 방대한 분량의 시집
창세기부터 2007년 삼겹살까지
‘운동·지향으로서의 삶’ 되새겨
창세기부터 2007년 삼겹살까지
‘운동·지향으로서의 삶’ 되새겨
〈거룩한 줄넘기〉
김정환 지음/강·1만8000원 “시내에서 양화대교 건너자마자 좌회전,/ 길 나오자마자 우회전하고 150미터쯤 올라오면/ 유원제일아파트 205동 1307호. 전화는 2635-4152” 책에 나와 있는 그대로였다. 지은 지 20년쯤 되었다는 서민 아파트의 꼭대기층에 시인의 거처는 있었다. 책은 별로 없고 엘피와 시디 음반이 빼곡한 거실 한가운데에 작업용 컴퓨터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그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셰익스피어 원서가 펼쳐져 있다. “이 화상을 뭐라 부를꼬?” 500쪽이 훨씬 넘는 방대한 분량의 시집 <거룩한 줄넘기>에 붙인 후기에서 김정환(54) 시인은 스스로도 당혹스럽다는 듯 자문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룩한 줄넘기>는 무어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잡다한 요소들의 범벅이자 총합과도 같은 것이다. 성경 창세기의 이야기와 12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고독에서부터 2007년 여름 새벽 포장마차의 삼겹살까지 멀고 가까운가 하면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북적이며 부딪치는 것이 이 시집의 풍경이다. “근육의 원만이 전율하는/ 전율이 내파하는/ 내파가 펼쳐지는/ 이미지의/ 얼음과 음식이/ 고독하게 경악하는/ 침묵이 다시/ 푸르르게 전율하는/ 거룩한/ 줄넘기, 그 속은// 신약이 구약의 속살이다.” ‘전율’이나 ‘내파’ 같은 특유의 용어들, 그리고 “일상은 갈수록/ 가혹한 형식이 사소화하는/ 내용일 뿐이다”와 같은 잠언투 어법으로 무장한 채 쉽사리 해독을 불허하는 시집이지만, 제목으로 쓰인 ‘거룩한 줄넘기’가 핵심적인 개념임은 짐작할 수 있겠다. 시인의 보충설명을 참조해서 이해해 보건대, ‘줄넘기’란 반복적인 운동을 이르며, ‘거룩한’은 그 운동이 지향하고자 하는 모종의 가치를 가리킨다. 요컨대 운동과 지향이 결합된 삶의 의미를 이 제목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정결한 노래의/ 몸이다./ 혁명가는 눈물의/ 피난처가/ 아니다. 노래는/ 노래 속으로 노래의 해방을/ 이루며 노래 밖으로 노래의/ 세계를 일군다. 노래는 노래가/ 노래의 혁명이다.” 운동과 지향으로서의 삶을 이해함에 있어 노래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때 에프엠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음악 에세이집을 낸 적도 있는 시인의 음악 사랑을 짐작하게 한다. 잡지 발표를 거치지 않고 전작으로 출간된 <거룩한 줄넘기>는 별다른 소제목이 없이 프롤로그에 이어 로마자 I에서 XVI까지 진행된 다음 ‘사랑노래-보유(補遺)’와 에필로그로 마무리된다. ‘사랑노래’는 생·로·병·사의 인생 네 단계를 사랑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거니와, 프롤로그의 다음 대목은 이 시집이 무엇보다 사랑과 혁명의 시집임을 알게 한다. “사랑, 그 허리 끊어지는 말 혁명 그 회오리치는 말, 사랑, 갈수록 짧아지는 그 말, 혁명, 갈수록 지리멸렬해지는 그 말, 사랑, 갈수록 가혹해지는 그 말, 혁명, 갈수록 멸망을 닮아가는 그 말, 사랑, 청순한 죽음을 닮아가는 말, 혁명, 무기력한 노년을 닮아가는 말, 우리가 한 몸이듯 둘이 따로 떨어져 있고 우리가 떨어져 있듯 둘이 한 몸인.” 지난해 펴낸 <드러남과 드러냄>에 이어 또 다시 대규모 전작 시집 <거룩한 줄넘기>를 상재한 시인은 지금 좋아하는 술도 줄인 채 셰익스피어의 희곡 37편과 시집 3권을 모두 번역하는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 작업에 진력하고 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김정환 지음/강·1만8000원 “시내에서 양화대교 건너자마자 좌회전,/ 길 나오자마자 우회전하고 150미터쯤 올라오면/ 유원제일아파트 205동 1307호. 전화는 2635-4152” 책에 나와 있는 그대로였다. 지은 지 20년쯤 되었다는 서민 아파트의 꼭대기층에 시인의 거처는 있었다. 책은 별로 없고 엘피와 시디 음반이 빼곡한 거실 한가운데에 작업용 컴퓨터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그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셰익스피어 원서가 펼쳐져 있다. “이 화상을 뭐라 부를꼬?” 500쪽이 훨씬 넘는 방대한 분량의 시집 <거룩한 줄넘기>에 붙인 후기에서 김정환(54) 시인은 스스로도 당혹스럽다는 듯 자문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룩한 줄넘기>는 무어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잡다한 요소들의 범벅이자 총합과도 같은 것이다. 성경 창세기의 이야기와 12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고독에서부터 2007년 여름 새벽 포장마차의 삼겹살까지 멀고 가까운가 하면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북적이며 부딪치는 것이 이 시집의 풍경이다. “근육의 원만이 전율하는/ 전율이 내파하는/ 내파가 펼쳐지는/ 이미지의/ 얼음과 음식이/ 고독하게 경악하는/ 침묵이 다시/ 푸르르게 전율하는/ 거룩한/ 줄넘기, 그 속은// 신약이 구약의 속살이다.” ‘전율’이나 ‘내파’ 같은 특유의 용어들, 그리고 “일상은 갈수록/ 가혹한 형식이 사소화하는/ 내용일 뿐이다”와 같은 잠언투 어법으로 무장한 채 쉽사리 해독을 불허하는 시집이지만, 제목으로 쓰인 ‘거룩한 줄넘기’가 핵심적인 개념임은 짐작할 수 있겠다. 시인의 보충설명을 참조해서 이해해 보건대, ‘줄넘기’란 반복적인 운동을 이르며, ‘거룩한’은 그 운동이 지향하고자 하는 모종의 가치를 가리킨다. 요컨대 운동과 지향이 결합된 삶의 의미를 이 제목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정결한 노래의/ 몸이다./ 혁명가는 눈물의/ 피난처가/ 아니다. 노래는/ 노래 속으로 노래의 해방을/ 이루며 노래 밖으로 노래의/ 세계를 일군다. 노래는 노래가/ 노래의 혁명이다.” 운동과 지향으로서의 삶을 이해함에 있어 노래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때 에프엠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음악 에세이집을 낸 적도 있는 시인의 음악 사랑을 짐작하게 한다. 잡지 발표를 거치지 않고 전작으로 출간된 <거룩한 줄넘기>는 별다른 소제목이 없이 프롤로그에 이어 로마자 I에서 XVI까지 진행된 다음 ‘사랑노래-보유(補遺)’와 에필로그로 마무리된다. ‘사랑노래’는 생·로·병·사의 인생 네 단계를 사랑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거니와, 프롤로그의 다음 대목은 이 시집이 무엇보다 사랑과 혁명의 시집임을 알게 한다. “사랑, 그 허리 끊어지는 말 혁명 그 회오리치는 말, 사랑, 갈수록 짧아지는 그 말, 혁명, 갈수록 지리멸렬해지는 그 말, 사랑, 갈수록 가혹해지는 그 말, 혁명, 갈수록 멸망을 닮아가는 그 말, 사랑, 청순한 죽음을 닮아가는 말, 혁명, 무기력한 노년을 닮아가는 말, 우리가 한 몸이듯 둘이 따로 떨어져 있고 우리가 떨어져 있듯 둘이 한 몸인.” 지난해 펴낸 <드러남과 드러냄>에 이어 또 다시 대규모 전작 시집 <거룩한 줄넘기>를 상재한 시인은 지금 좋아하는 술도 줄인 채 셰익스피어의 희곡 37편과 시집 3권을 모두 번역하는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 작업에 진력하고 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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