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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 초안4종 첫공개 ‘인민주권’ 공통으로 강조

등록 2008-07-09 18:40수정 2008-07-09 20:52

해방 정국에서 마련된 유진오의 제헌 헌법 초안(왼쪽)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 시안.  사진 고려대 박물관 제공
해방 정국에서 마련된 유진오의 제헌 헌법 초안(왼쪽)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 시안. 사진 고려대 박물관 제공
고려대 박물관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초안 등
좌우파 시안 검토한 ‘유진오 초안’ 처음 선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의 헌법 초안)

“모든 국가 기관 소속원은 인민의 기관원으로서 활동하고, 인민의 이익에 배반하여 행동할 수 없다.”(‘민주주의 민족전선’의 헌법 초안)

광복 직후 제출된 제헌헌법 초안 내용의 일부다. 좌우를 막론하고 헌법에서 ‘인민 주권’의 원칙을 강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고려대 박물관(관장 조광)은 ‘법으로 세상을 그리다’라는 주제로 오는 16일부터 8월15일까지, 정부 수립 직전의 여러 헌법 초안을 기획 전시한다.

초안은 모두 4종이다. △미군정청 법무부장 에머리 우달 소령이 1946년 초 작성한 ‘한국 헌법’(Constitution of Korea) △좌파들의 결집체였던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1946년 2월께 작성한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 시안’ △우파의 결집체였던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이 1946년 3월께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헌법’ △유진오 박사가 1948년 4월께 작성해 제헌헌법의 기초가 된 ‘헌법 초안’ 등이다.

1999년, 유진오 박사의 유족들이 고인의 유품을 고려대에 기증하면서, 이들 헌법 초안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지만, 지금까지는 연구자들에게만 열람이 허용됐다. 고려대 박물관은 이들 초안을 묶어 영인본을 발행할 계획인데, 이에 앞서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1948년 제헌국회가 제정한 제헌헌법 원본은 현재 망실된 상태다. 그 원본을 옮긴 필사본만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다. 원본이 그 지경이니 각종 초안이야 제대로 간수됐을 리 없다. 이런 까닭에 이번에 공개되는 4종의 헌법 초안이 각별한 가치를 지닌 기록물이라는 점에 학계의 이견이 없다.

이 가운데 유 박사의 ‘헌법 초안’은 200자 원고지 70여장에 메모 형태로 남아 있다. 1948년 4월 제헌헌법 기초위원으로 일하던 당시 작성한 것으로, 삭제·수정한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모두 10개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특히 첫머리에서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한다’고 밝힌 조항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헌법의 요체를 이루고 있다. 초안을 보면 정부 형태로 내각책임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나중에 이승만의 고집으로 대통령제로 바뀐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승만 제헌의회 의장이 1948년 7월17일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승만 제헌의회 의장이 1948년 7월17일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허헌·박헌영·여운형·김원봉 등을 주축으로 1946년 2월 결성된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광복 직후 좌파를 총괄하는 조직이었다. 이들이 남긴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 시안’은 정당·사회단체·대중단체가 참여하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전국대회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해 정부 수반으로 삼는다고 규정했다. ‘조선민주공화국’을 국호로 정하고, 만 18살 이상의 모든 인민에게 선거권·피선거권을 부여했다. ‘모든 국가기관은 인민의 기관이며 합의제를 대원칙으로 한다’거나 ‘모든 국가시설은 인민의 총유에 속하고 전 인민에게 균등하게 활용된다’ 등의 조항에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모두 8장으로 구성된 이 초안은 허헌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훗날 그는 북한 헌법 제정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승만·김구·김규식·윤치영 등이 참여해 1946년 2월 결성된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은 우파를 대표하는 조직이었다. 임시정부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결국 미군정의 자문기관 구실에 그쳤다. 이들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은 1919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의 맥을 그대로 잇는다. 정치·경제·교육의 균평균등이라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고 밝혔다. 정부 형태로는 대통령 중심제를 택했다. 모두 7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6장까지만 남아 있다.

우달 소령이 작성한 ‘한국 헌법’의 원본은 사라진 상태다. 이번에 공개되는 것은 유 박사의 필사본이다. 미국 헌법을 토대로 ‘국가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비롯하며, 국가 권력은 인민의 종교·언론·출판·평화적 집회의 자유를 박탈할 수 없다’고 적었다. 국회를 통한 간접 선거로 대통령·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조광 박물관장(한국사학과 교수)은 “당시 유 박사가 좌우파의 초안을 두루 확보해 검토했던 것은 당대의 요구를 폭넓게 수렴하려 했기 때문”이라며 “헌법 초안을 통해 각 정치세력이 어떤 입장에서 새로운 세상을 이뤄보려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기획전시 하루 전인 15일 오후 2시30분에는 이 대학 백주년기념관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현민 유진오’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연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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