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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친구·연인·동지보다 동무가 되라

등록 2008-07-18 19:42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 김영민씨는 두 사람이 평생 ‘동무이자 연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무가 말의 관계라면 연인은 살의 관계이기 때문에 둘은 포개지기가 쉽지 않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 김영민씨는 두 사람이 평생 ‘동무이자 연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무가 말의 관계라면 연인은 살의 관계이기 때문에 둘은 포개지기가 쉽지 않다.
배신-목표상실로 등 돌리지 않고
다름과 신뢰로 만난 사람들의 연대
‘속물의 시대’ 인문적 삶 실천해야
〈동무론-인문연대의 미래형식〉
김영민 지음/한겨레출판·2만5000원

철학자 김영민씨가 새 저서 <동무론>을 펴냈다.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이 책은 그의 철학적 사유가 응결된 ‘동무론’을 난만하게 펼쳐 보여주는 책이다. 머리말에서 지은이는 “1990년대 초부터 ‘장미와 주판’(www.sophy.pe.kr) 중심으로 인문학 공동체 운동을 꾸려오면서 겪고 누리고 공부하고 실천한 일들을 토대로” 하여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걸으면서 철학하는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단 ‘장미와 주판’은 독서와 여행, 공부와 실천을 일치시킴으로써 인문학적 깨달음의 생활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인터넷 모임이다. 여기서 만나 연대한 동무들의 ‘인문 좌파적 실천’이 이 글의 바탕이자 결실이 됐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서너 달 앞서 출간된 <동무와 연인>은 이 책의 내용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덤으로 맺은 열매라고도 할 수 있다.

<동무론>은 우선 글의 형식이 제목의 ‘론’과 마찰을 빚는다. 통상 ‘론’자가 들어간 글이면, 논문 형식 안에 서-본-결이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이런 형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일기 같기도 하고 잠언 같기도 하고 논술 같기도 한 글들이 잇달아 배치돼 있다. 몽테뉴 혹은 니체의 글쓰기 방식이 보여준, 비체계성 속의 사유의 번득임을 겨냥하는 듯하다. 지은이는 이 책 안에서 “체계는 체계에만 관심을 갖는다”라는 명제를 인용하며, 체계적 글쓰기가 빠지기 쉬운 자폐성의 함정에 대한 거부감을 얼핏 드러낸다.


〈동무론-인문연대의 미래형식〉
〈동무론-인문연대의 미래형식〉
동시에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아주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읽는이가 글쓴이의 의도에 가 닿으려면 나름의 지력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고, 그것이 공부의 본디 자세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지은이는 이 책 안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남겨 놓고 있다. “읽히는 글이 더는 글이 아닌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쉽게 읽히는 책은 이 시대와 불화하지 않은 채 그 세속적 흐름에 휩쓸려 가는 책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그가 말하는 ‘인문 좌파적 실천’이란 이 속물의 시대와 화해하지 않고 거기에 맞서는 인문학적 실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펼쳐 보이는 ‘동무론’의 ‘동무’를 포착하려면, 그 이웃 말인 친구·연인·동지 따위의 말들을 살피는 것이 좋다. 지은이는 동무가 친구와도 다르고 연인과도 다르며 동지와도 다르다고 확언한다. 그는 친구를 “친구야, 우리가 남이가?” 할 때의 그 친구로 이해한다. “한 번도 제대로 ‘남’이 되어보지 못한 관계의 기억은 완악하고 집요하고 추잡스럽다.” 연인이란 자기애 또는 이기심에 기초한 친밀성의 관계이지만, 상처와 배반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동지는 목표와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쳤으되, 목표가 사라지거나 깃발이 꺾이면 흩어지고 마는 관계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르면, 동무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본질적 속성으로 삼는다. 동무란 차라리, 같음(同)이 없는(無) 사이다. 그런 동무관계의 한 비근한 모습을 지은이는 연암 박지원의 말을 빌려 보여주기도 한다. “벗을 사귐에 ‘틈’이 가장 중요하다. 둘이서 무릎을 맞대고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해서 ‘서로 밀접하다’고 말할 수 없고, 어깨를 치며 소매를 붙잡았다고 해서 ‘서로 합쳤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 사이에는 틈이 있을 뿐이다.” 그 동무관계는 ‘친밀함’이 아닌 ‘서늘함’을 기반으로 삼는다.

지은이는 동무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조선 후기 북학파의 벗이었던 이덕무와 박제가의 관계를 든다. 박제가는 급진파였고 이덕무는 온건파였다. 이덕무는 박제가의 어떤 점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는 벗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나는 그대의 됨됨이와 성격이 남다른 것을 늘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네. 더구나 그대는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도 되레 우리와 다른 천 리 먼 중원의 풍속을 사모하는군.” 이런 이덕무를 박제가는 높이 평가했다. “신체는 허약하나 정신의 견고함은 지키는 바가 내부에 있기 때문이요, 외모는 냉랭하나 마음은 따뜻하니 몸가짐이 독실하기 때문이다.”


동무는 사적인 호의 또는 호감을 넘어서 신뢰로 묶여야 한다. 사적인 친밀성이 사회적 객관성을 띤 믿음으로 진화하지 않는 한 동무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 호의 또는 호감에서 시작하지만, 상대의 삶과 신념의 올바름에 대한 신뢰의 시험을 통과한 뒤 한층 높은 차원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동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계로 만나는 동무들이 인문적 삶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이 책의 부제가 가리키는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이라 할 것이다. 이때의 ‘인문’은 ‘무능’을 내적 본질로 한다. 돈 되는 것만을 유능한 것, 값진 것으로 보는 이 시대에 인문은 무능할 수밖에 없다. 돈과 값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 무능의 인문정신을 급진화하여 시대의 결을 거스르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인문 좌파적 실천’인 셈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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