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
한여름 식히는 ‘그늘 노래’ 3권
삶의 자연스러움·긍정성 강조
서늘하고 쓸쓸한 서정 돋보여
삶의 자연스러움·긍정성 강조
서늘하고 쓸쓸한 서정 돋보여
〈그늘의 발달〉
문태준 지음/문학과지성사·7000원 〈무릎 위의 자작나무〉
장철문 지음/창비·7000원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고운기 지음/랜덤하우스·6000원 그늘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바람 드는 느티나무 그늘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바닷가 파라솔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다면 시로 빚은 그늘은 어떨까. 그늘을 노래한 시들 말이다. 새로 도착한 시집들 속에서 그늘의 시를 찾아 읽는다.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감나무가 너무 웃자라/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그늘의 발달> 부분) 문태준의 시집은 아예 제목에서부터 그늘을 내세운다. 표제작에서 화자의 아버지는 지붕에 그늘을 드리우는 감나무를 베려 한다. 화자는 옛노래 <공무도하가>의 어조를 빌려 와 그런 아버지를 말린다. 그늘은 우리네 삶의 자연스러운 조건. 나무를 벤다고 “눈물을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이라는 구절은 시집 뒤표지에 쓴 시인의 산문에서는 “나와 나의 세계를 오로지 설명할 수 있는 둘레로서의 그늘”로 번역된다. 삶의 환경이자 원리로서의 그늘, 시를 생성시키는 동력으로서의 그늘이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그늘의 발달> 부분)
장철문 시집 <무릎 위의 자작나무>에는 꽃이 드리운 그늘을 하늘로 통하는 길로 파악하는 상상력이 나온다.
“꽃그늘에 서서/ 하늘에 건너간 꽃가지/ 그늘에 서서/ 아득히 하늘길 다녀왔느니,/ 처음인 듯/ 이 세상 한번은 살아볼 만한 것이었다”(<하늘 골목> 부분)
꽃그늘의 화사함이 하늘길이라는 비유를 끌어 오고, 그것이 세계와 삶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간다. 시인이 표제작을 비롯한 여러 시편들에서 딸로 상징되는 생명의 전승을 예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이런 긍정과 통한다 하겠다.
“단풍나무 그늘을 지나와/ 버림받은 길 위에서 그늘을 품에 담고/ 그늘을 닮아버린 사람이 있다”(<단풍나무 그늘을 지나와-애사(哀詞 3)> 부분)
고운기 시집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에 수록된 이 시에서 그늘은 화사하지도 않고 세계에 대한 긍정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이 그늘은 말하자면 문태준의 그늘을 닮았다.(그럼에도 그런 그늘이 삶의 조건이자 동력임은 앞서 살펴본 대로다.) 사실 그늘이란 화사하기보다는 서늘하며 그보다는 자주 쓸쓸하고 음습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그늘은 바람과 통한다. 땡볕을 가리는 게 그늘이라면 열을 식히기로는 바람만한 게 없다. 그렇다면 바람은 움직이는 그늘이라 할까. 말이 나온 김에 같은 시집에서 바람을 노래한 시를 읽어 보자.
“문을 열었을 때 함께 들어온 바람이 방 안을 먼저 살핀다./ 어둠 속의 냉기(冷氣)-/ 어쩐지 낯익은 듯 둘은 문득 몸을 섞는다.”(<빈방> 전문)
어둠 속 냉기와 몸을 섞는 바람이라. 어떤가, 이만하면 좀 시원해지셨는가. 그러나 그늘의 시편들만 챙기다 보니 다른 좋은 시들이 서운해하는 낯빛이다. 그중 한 편만 더 읽는다. 두꺼비를 닮은 시인의 자화상이자 자기 선언이다.
“내 걸음 가다 멎는 곳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 천천히 오직 천천히/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나왔소// 습한 곳에 바쳐질 조촐한 나의 목숨/ 나의 서정(抒情)”(문태준 <두꺼비에 빗댐-시> 전문)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문태준 지음/문학과지성사·7000원 〈무릎 위의 자작나무〉
장철문 지음/창비·7000원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고운기 지음/랜덤하우스·6000원 그늘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바람 드는 느티나무 그늘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바닷가 파라솔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다면 시로 빚은 그늘은 어떨까. 그늘을 노래한 시들 말이다. 새로 도착한 시집들 속에서 그늘의 시를 찾아 읽는다.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감나무가 너무 웃자라/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그늘의 발달> 부분) 문태준의 시집은 아예 제목에서부터 그늘을 내세운다. 표제작에서 화자의 아버지는 지붕에 그늘을 드리우는 감나무를 베려 한다. 화자는 옛노래 <공무도하가>의 어조를 빌려 와 그런 아버지를 말린다. 그늘은 우리네 삶의 자연스러운 조건. 나무를 벤다고 “눈물을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이라는 구절은 시집 뒤표지에 쓴 시인의 산문에서는 “나와 나의 세계를 오로지 설명할 수 있는 둘레로서의 그늘”로 번역된다. 삶의 환경이자 원리로서의 그늘, 시를 생성시키는 동력으로서의 그늘이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그늘의 발달> 부분)
한없이 몸낮춰 그늘에 엎드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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