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한민국’ 심광현 교수 “우리 전통의 문화를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한’이 아니라 ‘흥’입니다. 조선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맑고 경쾌한 아침의 나라’입니다. 일제시대에 일본 학자가 이름 붙여 퍼진 ‘한의 미학’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제대로 봐야죠.” 최근 우리 문화의 정체성 찾기와 ‘생태적 문화사회’를 위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두 권의 책 <흥한민국> 과 <프랙탈>을 한꺼번에 낸 심광현(49)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붉은 악마와 촛불 시위, 한류 열풍 현상은 식민시대, 냉전과 분단, 개발독재에 의해 억눌렸던 ‘흥’의 문화가 바야흐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말했다. “흥과 한, 그리고 무심은 동북아시아 유불선 문화권의 공통 정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식민시대에 만들어진 ‘한’의 아름다움에만 갇혀 그것에 머물러왔습니다.” 그래서 식민시대가 만든, 또는 서구의 근대 미학이 마련한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미학을 가장 잘 설명하는 시각의 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그 새로운 미학의 틀을 ‘프랙털’과 ‘생태학’이라는 미학 밖의 과학이론에서 가져왔다. “구불텅하고 주름진 금수강산, 비뚤비뚤한 소나무 정원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서구의 근대 미학으론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반듯하고 질서정연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미학에 서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아름다운 건 왜일까요?” 그는 겉보기에 무질서한 불규칙에서 ‘숨어 있는’ 아름다움의 규칙을 찾으려는 ‘프랙털’ 이론은 질서와 무질서를 나누고, 근대와 전근대를 가르는 이분법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고 주장한다. ‘흥’은 그런 프랙털의 정서다. “음이 아니라 양을 일으키는 김치·된장도 흥의 증거입니다. 구불구불한 자연과 생태, 건축물은 불규칙의 율동과 역동을 보여주는 흥입니다. 홍대용과 박지원, 정약용 등이 풍류를 즐기며 쓴 수필들이 아름다운 것도 흥과 프랙털의 어우러짐 덕분입니다.” 이 때문에 두 권의 책에선 여러 이론과 개념들이 어우러져 ‘잡종’을 이룬다. 생태학과 프랙털, 그리고 칸트·헤겔·들뢰즈의 미학이론, 한국의 전통예술, 그리고 우리 문화정책 등이 숨 가쁘게 전개된다. 그 요점은 “우리 문화를 다시 읽자”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학문을 가로지르는 그의 논증은 새로운 문화 연구를 추구하며 1991년 창간된 계간지 <문화과학>이 쌓은 14년 연구성과 위에 서 있다. 여기에 민예총·문화연대 등 문화운동단체에서 활동했던 그의 관심사, 그리고 김지하 선생과 나누는 사상 교류의 영향들이 버무려졌다.
우리 고유의 흥과 프랙털의 문화가 절정을 이룬 시기는 18세기 영·정조의 시기였다고 말하는 그에게 “1990년대 이후 다시 솟아나는 흥의 문화는 그야말로 200년만의 부활이며 회복”인 셈이다. 그는 “이런 논증이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여러 다양한 논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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