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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강백호의 ‘무대책 낙관주의’에 물들다

등록 2008-10-10 18:17수정 2008-10-10 19:18

〈슬램덩크〉
〈슬램덩크〉
내 인생의 책 /

〈슬램덩크〉
이노우에 다케히코 지음/대원씨아이

만족스러운 인생이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라고 요구되는 것’사이의 적당한 균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 삼 대 칠 정도의 비중으로 주어진 미션을 허덕이며 해나가는 것에 치여 사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자기주도적이지 못한 현 상황은 어쩌다 잘 풀려도 내 것 같지 않다. 또 못 되면 미련만 남고 후회의 한숨만 나온다. 나도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과거의 실수에 얽매이고,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미래의 불확실한 인정에 목을 매달았다. 그런데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주인공 강백호의 힘과 투지에 반한 유도부 주장은 어떻게든 그를 스카웃하려고 했다. 그러나 풋내기 농구부원 강백호는 “나는 바스켓맨입니다”라고 단호히 뿌리치고 농구장으로 향했다. 그전까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좌충우돌을 일삼던 문제학생 빨강머리 강백호는 정체성을 만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건, 인정을 받건 안 받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시작하고 나면 인생은 최소한 후회로 만신창이가 되지는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잘하건 못하건 “나는 바스켓맨”이라고 여기고 자기가 즐기고 싶은 일을 해나간다. 이전 세대의 가치관과는 확연히 달랐다. 까치나 오혜성처럼 복수를 위해, 질투심이 노력의 동기가 되지 않는다. 그냥 즐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게다가 서태웅이 모차르트처럼 천재적 플레이를 하지만 살리에르적인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난 천재 바스켓 맨이야, 잘 될거야”라고 여기는 대책없는 낙관주의가 기본 옵션이다. 긍정의 힘은 풋내기슛부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런 태도는 강백호뿐만 아니다. 북산이 강력한 상대 팀과 대등한 경기를 해나가자 감동한 채치수 주장이 ‘고맙다’고 하자 모든 선수들이 “웃기지 마! 날 위해서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지른다.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소한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은 족쇄일 뿐이라는 것을 한방에 일깨운다. 팀워크란 전체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진정 만들어지는 것이다.


<슬램덩크>를 만난 다음부터 물밑으로 삶은 조금씩 바뀌었다. “짧은 인생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살자”는 ‘나’ 중심의 삶과 “잘 될거야 걱정 마”라는 낙관적 태도가 서서히 몸에 물들어왔다. 남과 비교하면서 애태우지 않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주변을 돌이켜보면 보통의 정신과 의사와는 사뭇 다른 독특한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로 인해 이런저런 현실적 고단함은 있다.
하지현/건국의대 정신과 교수
하지현/건국의대 정신과 교수
그러나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강백호가 그랬듯이. 만일 내가 <슬램덩크>를 읽지 않았다면? 조금 더 학문적으로 성공하고 좋은 지위를 갖고, 훨씬 더 경제적으로 성취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쫓기는 듯, 결핍된 채 지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도 애장판 스물네 권은 내 책장 한 구석에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괜히 억지로 잘하려고 힘주지마. 무릎을 살짝 튕기고 왼손은 거들 뿐이야”라면서.

하지현/건국의대 정신과 교수

※ 각계 명사들이 쓰는 ‘내 인생의 책’이 이번주부터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베스트셀러 읽기와 함께 3주에 한 번씩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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