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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인생의 제3계절’에 비친 25가지 꿈

등록 2008-10-23 18:47수정 2008-10-23 19:09

오정희(61)
오정희(61)
오정희 콩트집 ‘돼지꿈’ 출간
업둥이·중년여성 실존 등
날카로운 감각적 묘사

오정희(61)씨의 신작소설을 만나 본 지 오래 되었다. 소품에 해당하는 <새>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첫 본격 장편이 될 ‘목련꽃 피는 날’을 잡지에 연재하다가 중단한 것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오정희 소설의 마력에 한번쯤 사로잡혀 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그의 오랜 침묵에 갈증을 느낄 법하다.

‘오정희 우화소설’을 표방하고 새로 나온 <돼지꿈>(랜덤하우스 펴냄)이 그런 갈증을 조금은 달래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우화소설’이라는 설명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전형적인 ‘콩트’에 해당하니까. 원고지 20장 안팎의 분량에 일상의 이모저모를 가벼운 터치로 담은 이야기들인 것이다. 이 책은 오정희씨가 등단 이후 사보와 잡지 등에 발표한 짧은 소설 스물다섯 편을 모은 콩트집이다.

콩트라고 하면 흔히 엉뚱한 인물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 기발한 반전 등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부담 없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오정희씨의 글들은 콩트에 대한 그런 일반적인 기대에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거기에 단순히 가벼운 웃음만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콩트라고는 해도 ‘역시 오정희’라는 탄성을 자아내는 대목들이 곳곳에 있다.

표제작을 비롯한 몇 작품에서 업둥이 모티브가 등장하는 점이 우선 눈길을 끈다. 표제작은 춘천에서 청량리로 가는 열차에서 마주 앉은 두 여성을 등장시킨다. 아기를 길러 본 경험이 없는 중년 여성 순옥, 그리고 이제 막 젖을 뗀 아기를 안은, 젊다기보다는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여성이 그들이다. 종적을 감춰 버린 아기 아빠가 춘천 출신이라는 말에 기대어 남자를 찾아 왔던 젊은 엄마는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아기 엄마가 잠에 떨어진 사이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돌보면서 순옥은 “처음 맛보는 듯한 기이하게 따뜻하고 연한 감촉”을 느낀다. 잠에서 깨어 그런 순옥의 모습을 본 아기 엄마는 모종의 ‘계시’를 받았던 모양이다.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중간역에서 기차를 내려 버리지 않았겠는가.

돼지꿈
돼지꿈
중학생 아들이 사고로 죽은 뒤 길에서 떨고 있던 아이를 데려와 1년 가까이 자식처럼 키웠으나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든가(<상봉기>), 제 아이가 있으면서도 추가로 부모 없는 아이를 입양한 부부가 시련과 갈등을 거친 뒤에 비로소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하게 되는(<색동저고리>) 이야기에서도 업둥이 모티브를 볼 수 있다.

오정희 소설의 특장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중년)여성의 실존적 조건과 심리를 날카롭게 투사하는 데에 있다. 본격 소설에 비해 분량이 적고 밀도도 떨어지기는 하지만 콩트에서도 오정희 소설의 그런 면모는 여전하다. “커다랗고 뻣뻣한 운동화 짝을 한없이 문지르며 빨 때, 방마다 널린 이부자리를 갤 때, 특히나 텔레비전을 보며 희희낙락하는 가족들 앞에서 엉덩이와 등허리를 보이며 엎드려 걸레질을 할 때면 설명하기 힘든 굴욕감을 느끼곤 했다”(<나는 누구일까>)에서 중년 여성의 삶의 구체성은 더할 수 없이 생생한 묘사를 얻는다.

그러나 역시 소설은 소설이고 콩트는 콩트인 것이, 소설에서는 같은 조건에서 비롯된 긴장과 갈등이 자주 파국으로 귀결되는 반면, 콩트는 긴장·갈등의 해소와 화해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야속해하던 주부가 ‘깜짝 선물’로 제주 여행을 가게 된다든가(<가을여행>), 매사에 시어머니를 못마땅해하던 며느리가 갑자기 하혈을 하는 바람에 예정일을 앞두고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시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확인하는(<해산>) 등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아마도 80년대에 발표했을 법한 <한밤의 불청객>의 마지막 대목은 구둣발로 집에 침입했던 도둑들이 소득 없이 돌아가고 난 뒤의 정황과 심리를 통해 당시 시대 분위기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읽혀 흥미롭다.

“밝은 달빛 아래 드러난, 이불 위에 찍힌 더러운 구두 자국들 그리고 짐승처럼 묶여 끙끙대는 우리의 모습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양식의 한 상징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랜덤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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