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교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증보판 낸 이진경 교수
1987년 진보진영 ‘사구체’ 논쟁 21년만에
“케인스주의도 국제 금융위기 해법 못돼”
푸코·불교까지 담은 저항·탈주 이론 내놔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항해 ‘사회구성체론’이란 구식 무기를 다시 꺼내든, 이 돌아온 ‘마르크스 키드’를 향해 물었다. 20세기의 ‘헌 칼’을 뽑아들고 21세기의 괴물에 맞서겠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답변은 단호했다. “헌 칼이라니, 당치 않다. 20년 가까이 책 쓰고 공부하며 부단히 칼날을 벼렸다. 칼만 갈아온 게 아니다. 강호의 고수들을 사숙(私淑)하며 새로운 초식까지 익혔다. 내 공력(工力)에는 마르크스와 레닌, 푸코와 들뢰즈, 나아가 불교철학의 비급이 녹아 흐른다.” 1987년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이란 저작을 들고 사회구성체 논쟁에 뛰어들었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보론을 덧붙인 이 책의 증보판(왼쪽)을 들고 21년 만에 독자 앞에 섰다. 당시 스물네 살의 대학원생이던 그는 이 책으로 논쟁의 한 축을 형성하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공박하며 이른바 ‘피디’(PD·민중민주) 진영의 핵심 이론가로 떠올랐다. 논쟁은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개념에 입각해 한국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정식화한 피디 진영의 우세로 기울었다. 그러나 1989~91년 사회주의권 붕괴로 현실의 지향점을 상실한 논쟁은 급속히 좌초했고, 사회구성체 개념도 ‘청산되어야 할 교조적 유산’으로 단죄돼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졌다. 지난 28일 연구 공간 ‘수유+너머’에서 만난 이 교수는 “사회구성체론의 틀로 자본주의와 한국 사회를 다시 다뤄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된 지난해 5월 즈음”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세력이 극단적 시장주의로 선회하고, 노동·시민 운동은 본래의 급진성을 상실한 채 체제내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모든 현상의 심층을 복류하는 변화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와 축적체제, 계급관계와 대중운동의 문제라는 실천적 관심에서 규명할 ‘새로운 사회구성체론’의 필요성에 절감하게 된 것이죠.”
‘토대-상부구조’라는 건축학적 비유 때문에 사회에 대한 정적이고 구조적인 분석틀로 오인받기도 하지만, 이 교수가 보는 사회구성체론은 사회를 동적인 형성과정으로 파악하는 변화·생성의 이론이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형성물로 봤습니다. 사회가 하나의 정형화된 형태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 요소들로 구성돼 있으며, 동시에 어떤 지배적 형태를 향해 나아가는 변화 과정 속에 있다는 관점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되는 어떤 ‘경향성’을 통해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방법론이죠.” 이런 경향성의 관점은 20여년 전 ‘청년 이진경’이 전(前)자본제적 지주-소작 관계부터 소상품 생산경제, 국가와 융합된 독점자본까지, 다양한 비동시적 경제요소가 공존하고 있던 당시의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의 가장 고도화된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경향의 이론’으로서 80년대 사회구성체론에는 자본주의 고도화가 보편적 추세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필연적임을 입증하려는 이론적 함의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교수는 이런 목적론적 가정을 기각한다. “과거 공식화됐던 역사법칙을 다시 끄집어낸다면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관점을 틀어 사회의 형성을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질적 영역들이 동일자의 힘에 의해 포섭·동질화되어가는 과정’으로 접근한다면 푸코·들뢰즈의 사상과 만날 수 있는 여지도 넓어집니다.” 이 지점에서 사회구성체론은 사회주의 이행의 필연성을 보증하고 변혁적 실천을 추동하는 무기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착취시스템의 전일적 지배를 비판·저지하기 위한 ‘저항과 탈주의 이론’으로 변환된다. 이 변환된 사회구성체론에 기초해 이 교수는 지금의 경제 시스템을 네트워크 경제의 확장으로 공장·국가 같은 공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흐름의 경제’로 개념화한다. “흐름의 경제에서는 유연성이 자본의 생존전략이 됩니다. 여기서 자본은 이동 능력을 높이기 위해 탈물질화·탈생산화되는 경향을 갖게 되는데, 그 결과가 ‘금융화’지요. 문제는 금융화가 기업마저 증권으로 만들어 사고파는 ‘경제의 증권화’를 가속화하면서 복제물이 복제물을 낳는 파생상품의 연쇄로 이어지고, 결국 위험에 대한 예측과 통제 가능성마저 사라져 버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금의 경제위기는 금융위기이자 동시에 흐름의 경제가 낳은 유연성 축적체제(신자유주의)의 위기라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케인스주의로의 회귀가 해법이 될 수 있을까? 그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케인스주의적 조정과 타협을 뒷받침할 잉여가치는 더 이상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케인스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아닌 새로운 축적체제를 찾아야 하는데, 자본 역시 그걸 못하고 있습니다. 미래 자본주의는 결국 자본의 다양한 축적전략과 이에 맞선 대중적 저항운동의 길항 속에서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이 교수의 분석은 부정기 매체 <부커진> 2호(오른쪽)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과잉-제국주의’ ‘유연성의 축적체제와 시뮬라크르 자본주의’란 글에 실려 있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케인스주의도 국제 금융위기 해법 못돼”
푸코·불교까지 담은 저항·탈주 이론 내놔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항해 ‘사회구성체론’이란 구식 무기를 다시 꺼내든, 이 돌아온 ‘마르크스 키드’를 향해 물었다. 20세기의 ‘헌 칼’을 뽑아들고 21세기의 괴물에 맞서겠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답변은 단호했다. “헌 칼이라니, 당치 않다. 20년 가까이 책 쓰고 공부하며 부단히 칼날을 벼렸다. 칼만 갈아온 게 아니다. 강호의 고수들을 사숙(私淑)하며 새로운 초식까지 익혔다. 내 공력(工力)에는 마르크스와 레닌, 푸코와 들뢰즈, 나아가 불교철학의 비급이 녹아 흐른다.” 1987년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이란 저작을 들고 사회구성체 논쟁에 뛰어들었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보론을 덧붙인 이 책의 증보판(왼쪽)을 들고 21년 만에 독자 앞에 섰다. 당시 스물네 살의 대학원생이던 그는 이 책으로 논쟁의 한 축을 형성하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공박하며 이른바 ‘피디’(PD·민중민주) 진영의 핵심 이론가로 떠올랐다. 논쟁은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개념에 입각해 한국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정식화한 피디 진영의 우세로 기울었다. 그러나 1989~91년 사회주의권 붕괴로 현실의 지향점을 상실한 논쟁은 급속히 좌초했고, 사회구성체 개념도 ‘청산되어야 할 교조적 유산’으로 단죄돼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졌다. 지난 28일 연구 공간 ‘수유+너머’에서 만난 이 교수는 “사회구성체론의 틀로 자본주의와 한국 사회를 다시 다뤄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된 지난해 5월 즈음”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세력이 극단적 시장주의로 선회하고, 노동·시민 운동은 본래의 급진성을 상실한 채 체제내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모든 현상의 심층을 복류하는 변화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와 축적체제, 계급관계와 대중운동의 문제라는 실천적 관심에서 규명할 ‘새로운 사회구성체론’의 필요성에 절감하게 된 것이죠.”
“마르크스는 사회를 형성물로 봤습니다. 사회가 하나의 정형화된 형태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 요소들로 구성돼 있으며, 동시에 어떤 지배적 형태를 향해 나아가는 변화 과정 속에 있다는 관점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되는 어떤 ‘경향성’을 통해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방법론이죠.” 이런 경향성의 관점은 20여년 전 ‘청년 이진경’이 전(前)자본제적 지주-소작 관계부터 소상품 생산경제, 국가와 융합된 독점자본까지, 다양한 비동시적 경제요소가 공존하고 있던 당시의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의 가장 고도화된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경향의 이론’으로서 80년대 사회구성체론에는 자본주의 고도화가 보편적 추세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필연적임을 입증하려는 이론적 함의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교수는 이런 목적론적 가정을 기각한다. “과거 공식화됐던 역사법칙을 다시 끄집어낸다면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관점을 틀어 사회의 형성을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질적 영역들이 동일자의 힘에 의해 포섭·동질화되어가는 과정’으로 접근한다면 푸코·들뢰즈의 사상과 만날 수 있는 여지도 넓어집니다.” 이 지점에서 사회구성체론은 사회주의 이행의 필연성을 보증하고 변혁적 실천을 추동하는 무기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착취시스템의 전일적 지배를 비판·저지하기 위한 ‘저항과 탈주의 이론’으로 변환된다. 이 변환된 사회구성체론에 기초해 이 교수는 지금의 경제 시스템을 네트워크 경제의 확장으로 공장·국가 같은 공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흐름의 경제’로 개념화한다. “흐름의 경제에서는 유연성이 자본의 생존전략이 됩니다. 여기서 자본은 이동 능력을 높이기 위해 탈물질화·탈생산화되는 경향을 갖게 되는데, 그 결과가 ‘금융화’지요. 문제는 금융화가 기업마저 증권으로 만들어 사고파는 ‘경제의 증권화’를 가속화하면서 복제물이 복제물을 낳는 파생상품의 연쇄로 이어지고, 결국 위험에 대한 예측과 통제 가능성마저 사라져 버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금의 경제위기는 금융위기이자 동시에 흐름의 경제가 낳은 유연성 축적체제(신자유주의)의 위기라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케인스주의로의 회귀가 해법이 될 수 있을까? 그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케인스주의적 조정과 타협을 뒷받침할 잉여가치는 더 이상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케인스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아닌 새로운 축적체제를 찾아야 하는데, 자본 역시 그걸 못하고 있습니다. 미래 자본주의는 결국 자본의 다양한 축적전략과 이에 맞선 대중적 저항운동의 길항 속에서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이 교수의 분석은 부정기 매체 <부커진> 2호(오른쪽)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과잉-제국주의’ ‘유연성의 축적체제와 시뮬라크르 자본주의’란 글에 실려 있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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