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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노동자 어머니 이소선
“지금 정규직이라고 천년만년 할것 같냐”

등록 2008-12-05 19:12수정 2017-05-17 11:51

고 전태일씨 어머니 이소선씨. 정용일 기자
고 전태일씨 어머니 이소선씨. 정용일 기자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후마니타스·1만2000원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야기 500일간 구술 녹음해 책으로 내
“소외받고 고통 당하는 비정규직 정규직이 나몰라라 해선 안돼”

“다시는 뭘. 이제 일이년이나 살겠어. 이게 마지막이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일이 있어 간 김에 인사만 하고 “다시 뵙겠습니다”며 돌아서던 오도엽(41)씨는 뜻밖의 대꾸에 되돌아섰다. 처음으로 이소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팔순의 그는 이미 “집회장에서 붉은 머리띠를 매고 독설을 퍼붓는 이소선”이 아니었다.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태일의 어머니도, 노동자의 어머니도, 노동운동가도 아닌 그냥 이소선, 내 할머니 같았다.”

그렇게 해서 오씨는 서울 종로구 창신2동에 있는 기념사업회에 주저앉았다. 그때가 2006년 11월. 2년이 넘은 지금까지 500여일간 그는 ‘어머니’와 동거하면서 주로 늦은 밤 “누군가에게 혼잣말처럼 되뇐” 그의 한 많은 이야기를 녹음테이프에 담았다. 180시간이 넘는 긴 분량이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는 그 80년의 기억 중에서 “세상에 할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펼쳐놓은 것”이다. 이소선의 삶은 한국 노동운동사, 아니 한국 현대사를 바꿔 놓은 그의 큰아들 전태일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지만, 이 책은 전태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소선의 이야기다. ‘노동운동의 대모’, ‘열사의 어머니’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자연인 이소선이 살아온 얘기에 초점을 맞췄다. 이소선이 이처럼 속속들이 털어놓은 적은 없다.

1980년대 쫓기던 대학생 지명수배자로 창원공단에 ‘잠입’한 뒤 15년간 노동현장에 있다가 시와 기록문으로 두 차례 ‘전태일 문학상’을 받으면서 기념사업회와 인연을 맺은 오도엽씨는 지난 2년간의 체험을 토대로 이소선을 “누구보다도 독특한 자신의 향기를 가진 사람, 그러나 향기를 내뿜는 순간 자신은 스멀스멀 사라지고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어떤 기억을 말하든 이야기의 중심은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을 내세우거나 높일 필요를 의식조차 못 하는 사람이었다. … 지금껏 살면서 했던 실천과 선택은 늘 주변 사람들의 절박한 요청에 성실하게 응답하고자 한 것, 그것뿐이었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역할은 바로 이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오씨는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가슴에 불이 일어” 새벽 4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하고 그리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뒤적이며, 매끼 당뇨와 혈압과 골다공증과 백내장 약을 세 주먹씩이나 삼켜야 하고, 이젠 5분 거리에 있는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을 가는데도 서너 차례 이상 멈춰 쉬어야 하는 이 늙은 여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내는 영원한 응원가이자 희망의 위안”이라고 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소선 여든의 기억〉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소선 여든의 기억〉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열사님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게 말이냐?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열사겠냐. 그냥 아들이야.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닌,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야. 그라고 분신자살했다고 한다. 어디 자살이냐. 항거지. 분신항거라고 해야 해. … 태일이를 열사니 투사니 하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줬으면 해. 전태일 동지. 그게 맞지 않냐.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 달라고 좀 써라.”

“태일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미쳐버리고”, “한번 이야기를 하면 사흘을 아파서 누워 있어야 하는” 그가 오씨에게 처음 눈물을 보인 것은 기구한 가족사와 어릴 때 헤어져 일본으로 간 오빠 얘기를 할 때였다. 이소선은 그때 홀로 뒤란 흙바닥을 긁으며 부른 노래를 뜬금없이 흥얼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일본에 있던 오빠와는 태일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연락이 닿아 만났으나 지금은 딴 세상 사람이 됐다. 존재조차 몰랐던 언니 소식도 70년 만에 들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오씨가 “이소선은 독재와 싸운 일보다 가난과 싸운 일이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고 했던 지독한 가난은 대구 달성공원 옆 남산동 포목상 아들이었던 남편 전상수의 거듭된 사업 실패와 요절에 따른 숙명이었다. 염천교 밑 거지형제들과 함께 자기도 했던 중앙시장의 ‘거지엄마’ 이소선의 인생은, 살아 있다면 올해 환갑인 태일의 청천벽력과 같은 죽음(1970년 11월13일)과 함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그러나 책에서 그 사건 자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책은 피 묻은 영안실 옷들을 수거해 세탁한 뒤 팔기도 한 헌옷장사, 시래기 주워 파는 장사를 하며 그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르는, 라면조차 마음대로 먹지 못한 태일의 가난한 동료들과 함께 “노동청장이 찾아와 거만을 떨자 아예 목덜미를 이빨로 깨물어 쫓아버릴” 정도의 결기로 세상과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에 대한 추억들, 어릴 때의 기억 등으로 채워져 있다.

2006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 때 ‘전태일노동상’을 주고 단상을 내려가던 이소선이 갑자기 뒤돌아 와 사회자한테서 마이크를 낚아채고는, 도저히 그냥 갈 수 없다며 쏘아붙였다. “입으로만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치면 뭐 하냐. 가장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해서 어찌 민주노총이라 할 수 있냐. 지금 정규직이라고 천년만년 정규직 할 것 같냐.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손잡고 싸우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정규직도 비정규직 신세가 되어 발목에 쇠사슬 차고 노예처럼 일하게 될거다.”

이소선은 “이런 얘기 무슨 재미가 있다고 읽겠느냐”고 했지만, 오씨는 요즘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부쩍 많이 쓰는 이소선의 구술에서 가슴 뭉클한 메시지를 읽어냈다. “누군들 미쳐 살 만큼 힘들지 않겠는가. 그래도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 고맙다는 말, 다 못하고 헤어지고 떠나보낸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 모두가 내 인생의 주인공들이다. 고맙다. 지겹도록 고맙고 또 고맙다. 그립다. 보고 싶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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