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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산문으로 그린 그림, 그림으로 쓴 산문

등록 2009-01-16 18:56수정 2009-01-16 19:10

고은(76) 시인
고은(76) 시인

〈개념의 숲〉
〈개념의 숲〉
〈개념의 숲〉
고은 지음/신원문화사 펴냄·1만2500원

고은 시인 특유의 파격 담은 산문집
“아무래도 생명은 술어일 것”
시간·사랑 등 개념 잠언투 설명
직접 그린 35편의 그림도 실어

고은(76·사진) 시인은 지난해 등단 50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신작 시집 <허공>을 내놓았고, 손수 그린 그림들을 모아 ‘동사를 그리다’라는 이름의 전시회도 열었다. 해를 넘겨서는 후배 시인 김형수씨가 그의 대표시 66편을 추려 묶은 선집 <오십 년의 사춘기>(문학동네)를 펴냈다.

시선집과 비슷한 무렵에 나온 <개념의 숲>은 산문집에 해당한다. 산문집이되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산문집. 우선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 ‘개념의 숲’은 시, 시간, 사랑, 악, 망각, 미래, 음악, 축제, 여성 등 다채로운 개념들에 대한 잠언투의 설명들로 채워졌다. 뒷부분 ‘지평선’은 지난해 초 신문에 연재했던 긴 산문 13편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동사를 그리다’ 전시회에 선보였던 시인 자신의 그림 35점이 곁들여졌다.

‘개념의 숲’도 그렇고 ‘지평선’도 그렇고 일관된 줄거리나 주제의식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시적인 통찰과 번뜩이는 예지가 이 책의 몫이다. 비약과 전복을 즐기는 고은 시의 특성이 예서도 여일하다. 가령 그가 깨달음과 취기, 행복과 불행의 가치를
뒤집는 장면을 보라.

“나는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백도 니체도 취한 무뢰한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13쪽)

“행복은 철학의 지옥이다. 시의 무덤이다.”(24쪽)


‘파천황’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시인의 파격과 도발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가 “축제야말로 사는 것”(120쪽)이라거나 “살아 있는 시와 시인은 불안이다”(199쪽), 또는 “아무래도 생명은 술어일 것”(225쪽)이라고 쓸 때도 ‘파란과 신명’으로 요약되는 그의 문학관·인생관은 잘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일상의 정복(淨福)을 백안시하거나 현실의 작동원리로서 욕망의 에너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리의 들개가 석양 머리 언덕에 혼자 서 있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아침 참새 소리 이 가지 저 가지에서 분주하구나. 이것으로 천만년 이래의 하루가 온전하다.”(205쪽)

“욕심 버리기, 욕심 죽이기를 수행의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욕망에 대한 일련의 부정적 강조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런 지혜 따위와 상관없이 욕망의 현장이고 욕망들이 어우러진 시장인 것이다.”(253쪽)


지난해 등단 50돌을 맞아 마련한 전시회 ‘동사를 그리다’에 내놨던 고은 시인의 그림 <어떤 정신> 부분(왼쪽)과 <만년설> 부분.
지난해 등단 50돌을 맞아 마련한 전시회 ‘동사를 그리다’에 내놨던 고은 시인의 그림 <어떤 정신> 부분(왼쪽)과 <만년설> 부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소식에 접한 70년대 벽두 이래 시인은 민족·민주의 기치를 문학으로써 감당하고자 분투해 왔다. 그의 이름 앞에 흔히 붙는 ‘민족 시인’이라는 수식은 민족‘주의’ 시인이라는 뜻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시인 자신 그런 수식과 이해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민족의 아들인 동시에 우주의 자식을 자처한다. 민족이라는 특수와 세계 및 우주라는 보편은 그에게 분리할 수 없는 한몸과도 같다.

“한반도의 분단 시대가 끝나면 내 입에서 민족이란 낱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104쪽)

“어디 여기만이 천 겁 내내 내 조국이런가. 살다 보니 내 고향, 내 조국, 내 연합지역들, 수수천만이더군. 나 헤픈 들병장수 아녀. 나는 나의 무한 복수(複數) 그것이야.”(211쪽)

‘무한 복수’로서의 자아에게 세상은 언제나 새로우리라. 지난해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 <허공>을 내고서도 시인은 “첫 시집을 낸 듯 마음이 설렌다”고 말했다.

원로의 지혜보다는 청춘의 시행착오를 선호하는 시인이기에 그의 앞에는 늘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 그에게는 길 아닌 것이 없다. 어디든 들메끈 매고 이슬 차며 나서면 그곳이 바로 길이 된다. 새해 새 아침 ‘젊은 고은’은 다시 길을 나선다.

“해가 떴으니 나도 들메끈을 매고 이슬 차며 길을 나서야겠다. 길은 어디에나 이미 있다. 루쉰은 괜히 여럿이 가면 그것이 길이 된다는 허튼소리를 했던가.”(190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신원문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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