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이미지 디자인 이제 시작이죠” 문자를 압도하는 이미지의 해일이 덮쳐온다. 그 포말의 진군을 문자들의 안식처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이미지의 시각적 힘을 빌리지 않고는 책이 책으로서 기능하기도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책의 표지에서부터 본문까지 이미지들은 얌전히 주저앉은 문자들 앞에서 위력시위를 벌인다. 그러나 이 새로 출현한 점령군은 차림새가 아직 단정치 못하다. 화려하지만 표피적이거나 폼은 재지만 어설프다. 책 디자인은 청소년기의 아노미 상태다. 홍동원(45) 글씨미디어 대표는 이 디자인과 오랫동안 씨름해온 사람이다. 디자인 중에서도 문자들의 놀이터인 책과 신문의 디자인에 주력하며 자기 세계를 개척해온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문자와 이미지가 따로 놀지 않고 정겹게 마주앉을 수 있는지, 아니 그보다는 이 이미지의 시대에 문자가 주눅들지 않고 반듯하게 서 있을 수 있는지를 책 편집과 신문디자인을 통해 입증해보려 애썼다. 글씨미디어는 그 디자인 감각을 숙련시킨 활동공간이다. 그가 이 공간에서 출판 자회사를 차려 ‘분홍개구리’란 간판을 내 걸고 출판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영문 주간지 <타임> 자회사에서 펴낸 ‘인챈티드 월드’(황홀한 세계) 시리즈 1차분 다섯 권(<천지창조> <용> <거인> <사랑> <마법>)을 우리말로 옮겨 내놓은 것이다. “신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시대이기는 한데, 그걸 이미지로 소화해 제대로 보여주는 책은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랫 동안 기다리다 제가 직접 해봐야겠다고 용기를 냈습니다. 이미지 디자인을 책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제 나름대로 보여주고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출판계에서는 책 디자인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고, 여러 일간 신문의 지면과 제호를 디자인한 경력이 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으로 그는 한국인의 눈에 맞는 편집을 꼽았다. ‘한국인의 눈’이 따로 있나? “그럼요. 서구인과 비교하면 한국인이 훨씬 더 이미지 지향적입니다. 서구인들은 글자로 된 단어나 문장을 읽고 그림을 보아야 더 잘 이해하지만, 한국인은 그림을 먼저 보고 텍스트를 보아야 더 잘 이해합니다. 따라서 서구인에게 맞는 책 편집과 한국인에게 맞는 책 편집이 따로 있습니다. 서구의 책은 텍스트가 앞에 나오고 그림이 뒤에 따라붙어야 좋지만, 한국인용 책은 그림이 먼저 나오고 텍스트가 뒤따라야 이해하기 편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시리즈에서 자신의 디자인관을 그대로 편집에 옮겨보았다. 원서의 문자만 번역하는 게 아니라, 디자인 자체를 번역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림의 위치나 배열을 한국인의 눈에 맞도록 바꾸는 것인데, 가령, 원서의 차례에는 문자만 나오지만, 번역서에서는 본문 중의 그림을 빼내 문자 아래 함께 놓았다. 이런 감각의 차이를 그는 독일 유학중에 느꼈다고 말한다. “독일인들은 칠판에 단어 하나만 써놓고도 얼마든지 토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렇게 단어만 써놓으면 힘들어합니다. 그림이나 이미지를 보여주고 거기에서부터 토론을 하라고 하면 더 잘합니다.”
그는 이렇게 나름의 경로로 얻은 디자인 철학을 앞으로 펴내는 책들에서 구현해볼 생각이다. 특히, 서양의 미키마우스 같은 보편적 캐릭터에 육박하는 우리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보고 싶다는 의욕을 밝혔다. 우선은 이 시리즈를 21권까지 완간하는 것이 목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