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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껌처럼 저항하라, 씹히되 삼켜지진 않는…

등록 2009-02-12 17:39수정 2009-02-12 19:27

김기택(52)
김기택(52)
김기택 다섯번째 시집 ‘껌’
약육강식 육식 문명속
산낙지·삼겹살·생선 응시
세계 구할 비폭력성 퍼올려

김기택(52)씨가 다섯 번째 시집 <껌>(창비)을 묶어 냈다.

김기택 시의 특장이라면 꼼꼼한 관찰과 집요한 묘사를 들 수 있다. 새 시집에서도, 감은 눈에 비치는 “온갖 색깔들과 형태들과 움직임들”을 포착한 <눈>이라든가, 졸음과 싸워 가며 책을 읽으려다가 결국은 졸음에 지고 말기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묘사한 <책 읽으며 졸기>와 같은 작품에서 작가의 관찰력과 묘사 능력은 한껏 발휘된다.

이번 시집에서 그런 관찰과 묘사가 주로 부각시키는 것은 폭력과 속도라는 문명 세계의 두 속성이다. 아니, 여기서는 속도 역시 폭력의 일종으로 파악되고 있으니, 시집 <껌>의 세계를 폭력의 만화경이라 요약할 수도 있겠다.

“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 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나지 않게 삼켜버린 것이다./(…)/ 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 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 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고양이 죽이기> 부분)

“뱀 아가리 속같이 길고 컴컴한 당신의 목구멍과 식도 속으로/ 닭이 된 어린 영혼 하나가// 들어간다”(<삼계탕> 부분)

<껌>의 세계는 폭력의 원리 위에 구축되어 있다. 폭력은 빠르고 강한 자가 느리고 약한 자를 짓밟고 먹이로 삼는 수단이다.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한 인간들은 삼겹살과 산낙지와 삼계탕과 껌을 핥고 빨고 깨물고 짓씹는다. 균형을 잃고 넘어질까 봐 조심조심 걷고 있는 노인 곁을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빠른 시간”(<한가한 숨막힘>), 느릿느릿 나아가는 짐자전거의 뒤꼭지를 삼킬 듯이 압박하며 “사자 아가리 같은 경적〔을〕 쩌렁쩌렁 울”(<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리는 덤프트럭 같은 속도의 강자들 역시 폭력을 행사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속도와 폭력의 공화국에 열외란 없다. ‘속도=폭력’의 파괴적 실상에 누구보다 민감한 시인이 “이 운전을 아무래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이 불편한 속도를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죽거나 죽이거나 엉덩이에 뿔나거나>)고 토로하는 것을 보라. 우리 모두는 이미 속도와 폭력에 중독되어 있다.


<껌>
<껌>
그렇다면 치료는 불가능한 것일까. 속도와 폭력의 지옥 바깥으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석쇠 위에서 불에 구워지고 있는 생선과 눈을 맞추어 보자.

“생선 굽는 나를/ 지글지글 구워지는 눈으로 보고 있다.// 눈꺼풀 없는 눈./ 절대로 눈을 감을 수 없도록/ 눈꺼풀을 없애버린 눈./(…)// 아무것도 볼 필요가 없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아직도 눈을 뜨고 있다./ 이글이글 익는 눈으로/ 눈을 태우는 불을 보고 있다.”(<생선구이> 부분)

굽는 ‘나’의 눈과 구워지는 생선의 눈이 마주칠 때, ‘나’는 ‘나’를 보고 있는 생선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이제 보는 것은 생선이고 보이는 것이 ‘나’다. 시선의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는 것. ‘나’는 강자의 차가운 눈 대신 약자의 뜨거운 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세계관의 혁신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표제작 <껌>과 <삼겹살> <산낙지 먹기>와 같은 작품들은 폭력적 식욕의 대상인 약자들이 무능을 가장한 수동적 저항으로써 강자를 깨우치고 구원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제 몸을 지글지글 지진 손을/ 제 몸을 짓이긴 이빨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아직도 비명과 발악이 남아 있는 비린내가/ 제 시신이 묻혀 있는 내 몸속으로/ 끈질기게 스며들고 있다.”(<삼겹살> 부분)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껌> 부분)

씹히되 끝내 삼켜지지는 않는 껌, 삼켜지되 냄새라는 흔적을 남기는 삼겹살. 약육강식의 문명 세계를 구원할 가능성은 이들의 ‘비폭력 (무)저항’에 있다고 시인은 암시하는 듯하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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