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네 맘 억누르는 것들…속시원히 뱉어봐

등록 2009-04-24 19:27수정 2009-04-24 19:30

네 맘 억누르는 것들…속시원히 뱉어봐
네 맘 억누르는 것들…속시원히 뱉어봐




<욕시험>
박선미 글·장경혜 그림/보리·8500원

아는 사람 중에, 사춘기 아들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안달하던 이가 있는데, 우연히 욕설로 도배된 아들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넋을 잃었단다. 영화에서 욕하는 걸 보는 것과 직접 내 귀로 얻어먹는 욕이 다르듯이 “초등학생 95%가 평소 욕을 한다”는 통계와 내 아이가 뱉는 욕은 하늘과 땅 차이겠다. 그래도 우리는 욕쟁이 할머니까지 욕보인 대통령을 모시고, 초등학교 4학년만 되어도 욕을 못하면 소통이 안 된다는 교실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꿋꿋이 살고 있지 않은가.

욕시험>은 “하고 싶은 욕 있으면 다 적어보라”는 선생님 말씀대로 시험지 한바닥에 욕을 가득 적은 주인공 야야의 이야기다. 그동안 “동무들이 놀려대도 오빠가 애먼 소리로 시비를 걸어도” 선생 딸이라서, 착한 아이라서, 입을 꾹 다물고 참았던 욕이 야야의 연필 끝을 타고 줄줄이 튀어나온다.

네 맘 억누르는 것들…속시원히 뱉어봐
네 맘 억누르는 것들…속시원히 뱉어봐

욕 써내는 ‘욕시험’ 본 아이들
마음의 짐 훌훌 털고 화사해져
작가 어린시절 체험 녹여 담아


욕을 하면 후련하다던데 야야는 온통 후회뿐이다. 걱정되고, 부끄러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울었다. 이런 야야가 욕에 중독된 요즘 아이들과는 영 딴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책에는 아이들은 모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것이라는 작가의 믿음이 실려 있다.

<욕시험>은 전작 <달걀 한 개> <산나리>처럼 박선미 작가의 어린 시절 체험을 고스란히 담은 동화다. 작가가 다니던 경남 밀양의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치렀던 욕시험을 떠올리며 3~4일 만에 책 한 권을 써버렸다니 작가야말로 ‘진짜 욕쟁이’인 것 같아 부럽고 “너거들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게 뭔지 알고 싶어하는” 선생님을 가져서 더욱 부럽다. 선생님이 도닥거린 덕에 마음의 짐을 덜고 꽃처럼 화사해진 야야는 또 어떻고.

<욕시험>
<욕시험>
살벌한 욕잔치만 벌이는 우리 아이들에겐 이런 기회가 없을까. 뜻있는 교사들이 있다면 교육과학기술부에 ‘전국 욕 일제고사’를 제안해 봄직하다. 물론 성취도 평가라는 시험에 걸맞게 평가 기준도 있어야 한다. 대상 없는 악담, 독창성 없는 되풀이, 노여움을 삭이지 않은 감정배설 등은 감점 대상이고 풍자, 해학, 기지 등은 가점 대상이다. 학교별 결과가 공개되는 이 시험을 위해 교사들이 평소 김삿갓의 ‘욕시’나 “조심하라고! 혓바닥 따라 일본 건너 갈라” “우라질 세상, 눈 가리고 아웅도 꾀바르게 해야지”(<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같은 모범이 될 만한 욕 사례를 꾸준히 가르쳐야 함은 물론이다. 교육청 주관이긴 하지만 시험 대신 섬진강 시인 김용택, 정의구현사제단의 문정현 신부 같은 고수 욕쟁이를 만나 체험학습을 하는 것은 교사 재량에 맡길 수 있겠다.

욕 안하는 5% 아이들마저 물들일까 겁난다고? 독설을 집중적으로 들은 식물이 자라기도 전에 시들어버리더라는 어떤 과학자의 실험이 있긴 하지만 만날 “이 거름에도 못쓸 놈아 쌔가 만발이 빠질 놈아”(<욕시험>) 하는 소리를 푸짐하게 듣는 논의 벼는 잘만 자라지 않는가. 욕도 욕 나름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