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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재해 같은 삶 역겨워도 ‘떠나지마’

등록 2009-06-21 18:04수정 2009-06-21 18:51

강영숙씨
강영숙씨
강영숙 단편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이상기후·실패한 연애…길 잃은 주인공들
“고분고분 살 수는 없지” 저항과 치유 그려
강영숙씨의 세 번째 소설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문학동네)가 나왔다.

단편 아홉이 묶인 소설집을 일별할 때 우선 두드러지는 것은 두 가지다. 가뭄과 홍수, 해일과 황사 같은 자연재해의 묘사가 두드러진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들이 실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해안 없는 바다>의 주인공인 예순 살 여성은 타이 푸껫을 덮친 쓰나미로 이혼한 남편이 크게 다치고 재혼한 부인에게서 얻은 그의 어린아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스쿠터 활용법>의 여주인공은 방송사에 근무하는 남자 친구가 지진해일 현장에서 울고 있는 나이 든 여자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화면에서 보며, <안토니오 신부님>의 여주인공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미얀마의 사이클론을 보며 울”기도 한다. <령>의 도시는 겨울임에도 봄보다 더한 황사에 시달리며, <천변에 눕다>의 여주인공은 아예 폭우로 범람한 천변을 걷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실패한 연애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안토니오 신부님>의 여주인공은 거듭해서 남자들을 만났다가는 헤어지면서도 “지금껏 사귄 그 어떤 남자와도 완전히 헤어지지 못했”다는 느낌에 시달린다. <갈색 눈물방울>의 여주인공도 “오 년간이나 만났던 애인과 헤어졌”으며, <스쿠터 활용법>과 <령>의 주인공들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드물게 남자 주인공을 등장시킨 에서도 주인공인 이혼남은 직장 동료 K를 상대로 핑크빛 로맨스를 꿈꾸다가 쓴맛을 보고 만다.

자연재해와 실연으로 대표되는 강영숙 소설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 보면 세계에 대한 비관적이며 허무적인 태도를 만나게 된다. 자연재해나 실연 같은 외적인 상황이 사태의 핵심은 아닌 것이다. 사실 강영숙씨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분위기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강영숙 소설의 주인공들이 드물지 않게 괴팍하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그들의 비관적인 세계관에 기인한 바가 크다.

“놀고 있는 어린애들을 무심히 보고 있으면 애들을 차례로 공터로 끌고 가 목을 눌러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머리카락도 죄다 밀어버리고 싶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오는 종아리의 셀룰라이트도 가위로 잘라버리고 싶었다.”(<안토니오 신부님>)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안토니오 신부님>의 여주인공이 순간적으로 보이는 심리적 발작의 묘사인데, 그것이 반드시 실연과 실업이라는 이중의 재앙 탓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뒤통수를 향해 탬버린을 던지는 <스쿠터 활용법>의 주인공, 회의중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장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는 의 한 인물, 또는 매립지 위에 들어선 신도시의 공기를 두고 ‘역겨워’라며 혼잣말을 하는 표제작의 주인공에게 돌연한 공격성과 냉소적 태도는 거의 체화된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살 수 없지, 난!”(<안토니오 신부님>)이라는 말은 강영숙 소설의 주인공들을 대리한 외침이라 할 법하다.

이렇듯 공격적이고 비관적인 인물들이 이따금씩 보이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는 강영숙의 소설 세계가 아직은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령은 가방을 뒤졌다. 약국에서 받은 드링크 한 병이 가방 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령은 그걸 꺼내 할머니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령은 할머니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증거라고 믿었다.”(<령>)

“남자는 알록달록한 우산들을 초록 풀이 자란 공터에 펼쳐놓고 동남아 여자와 함께 춤을 추었다. 어디서 났는지 달짝지근한 술도 가져왔다. 우리는 술을 한 모금씩 입속에 부어넣으며 각자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며 도시 한 귀퉁이에다 대고 웃음을 토해버렸다.”(<갈색 눈물방울>)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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