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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버리고 싶은 과거, 안고 가야 할 기억

등록 2009-06-28 19:46

이현수씨
이현수씨
이현수 소설집 ‘장미나무 식기장’
이현수씨의 두 번째 소설집 <장미나무 식기장>(문학동네)에서는 곰삭은 된장 맛이 난다. 책에 묶인 일곱 단편은 한결같이 시선을 과거로 향하고 있다. 현재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며, 미래는 유턴 표시처럼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그 과거는 주인공의 성장기처럼 가까운 과거일 수도 있고, 앞선 세대나 문화재의 제작 연도처럼 수십 내지 수백 년 단위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 중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녹>)나 고고학자 남편(<장미나무 식기장>), 불교미술관 학예실장(<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처럼 문화재 관련 일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도 이 소설집의 과거지향적 성격을 말해 준다.

그 과거가 반드시 아름답고 소중해서 보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간섭하고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마뜩잖은 존재로 그려지기 일쑤이다.

현재와 미래를 괴롭힐 뿐…과거에 대한 회의 담았지만
영광 아닌 상처도 역사… 옛것의 소중한 가치도 그려

<녹>의 주인공인 국립중앙박물관의 포장 전문 학예사는 “손을 믿는” 인물이다. 손에 와 닿는 촉감만으로 유물의 진위와 가치 여하를 판단하는 능력을 지닌 그는 “이백 년 전의 먼지가 묻은 손” 덕분에 여자를 만나지만, 또한 그 손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여자를 떠나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이제는 멈추고 싶다. 손은 단지 손일 뿐이다. 그동안의 사역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의 생각은 손으로 상징되는 과거지향성에 대한 진한 회의를 담고 있다.

역시 불교미술관 학예실장을 등장시킨 <남은 해도 되지만…>에서도 주인공 은영은 여덟 살 연하인 정호의 적극적인 구애에 결혼을 마음먹지만, 종손으로서 전주의 고택을 지켜야 하는 정호의 처지를 확인하고는 마음을 접는다. “종부로 폼 잡는 덴 단 십 분이요, 그 십 분의 폼을 위해 평생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산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장미나무 식기장>
<장미나무 식기장>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태도가 과거에 대한 비판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은 아니다. <녹>과 <남은 해도 되지만…>의 주인공과 같은 회의적 태도의 한쪽에는 옛것에 대한 근본적 신뢰와 의지가 엄연히 자리잡고 있다. ‘왜 하필이면 역사학도가 됐냐’는 은영의 질문에 정호는 이렇게 답한다. “기억하려고. 내 나라, 내 집안,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모든 걸. 옳은 것만 역사인 건 아니잖아.” 그의 답은 집안의 영광과 훈장만이 아니라 치욕과 상처 역시 온전히 끌어안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표제작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들었던, 무용지물과도 같은 쌀통 겸용 책상에 얽힌 이야기를 회고한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결론 역시 옛것의 소중한 가치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들린다.

“번개가 치듯 찰나에 스러지고 마는 생의 한순간을 오롯이 기억하자면 그들도 대책 없이 큰 책상이나 수퉁스런 장미나무 식기장 하나쯤은 가져야 하는 것이다.(…)우리 모두를 지은 그 집들이 전부 불에 타기 전에.”(<장미나무 식기장>)

소설집 곳곳에 등장하는 ‘세월의 냄새’ ‘세월의 더께’ ‘세월의 때’ 같은 표현들, 그리고 시남시남, 수퉁스럽다, 시르죽다, 되똑하게 같은 토속어들 역시 묵은 장맛 같은 책의 분위기를 돕는다.

각박하고 번다한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느긋하게 과거를 관조하는 시선 때문일까, 이현수 소설의 서사는 집중과 초점화가 아닌 분산과 나열의 특징을 보인다. 본론과 주제를 향해 일로매진하는 방식이 아니라 곁가지와 방계 서사를 한껏 거느리면서 느릿느릿 진행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담고 있는 책 전체에서도 핵심적인 전언을 담고 있는 대목이라면 방랑벽이 있던 엄마가 끓여 주는 감자탕을 먹는 순간의 묘사를 들 수 있겠다.

“감자탕을 먹는 동안은 호주라는 무거운 짐도 내려놓을 수가 있었고, 슬픔과 분노, 원인을 알 수 없는 노여움, 삿된 기운일 수도 있는, 몸 안에 떠도는 대책 없는 열기 들을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잠재울 수가 있었다.”(<추풍령>)

글 최재봉 문학전문 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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