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친일파, 다시 역사법정에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
“세상엔 ‘감추고자 하는 자’와 ‘밝히고자 하는 자’가 있다.” 이 얘기는 어떤 사안에도 적용되겠지만, 특히 한국에서 친일파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적확한 말이다.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반민특위는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제헌의회에서 결성됐지만,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다. ‘감추고자 하는 자’들의 저항이 거셌기 때문이다. 더욱이 반민특위가 조사·재판했던 친일인사 688명에 대한 기록은 대검찰청에 이관·보존됐어야 했는데도 대부분 유실됐다.
하지만 ‘밝히고자 하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한 ‘친일파’에 의해, 사회적 금기가 돼버리다시피 한 ‘친일파’란 말을 다시 사회에 불러내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해왔다. 그 정점이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일 것이다.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전 4권)은 ‘밝히고자 하는 자’의 이런 노력이 거둔 결실이다. 정운현 위원회 전 사무국장은 ‘감추고자 하는 자’들이 끝내 훼손하지 못한 반민특위 재판기록을 1999년부터 10여년 동안 ‘풀어쓰는 작업’을 해왔다. 원자료가 초서체인데다 한자말 또한 워낙 많아서 학자들조차 접근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밝히고자 하는 자’의 이런 10년 노력은 경찰, 중추원 참의, 기업인, 군수업자, 종교인 등 다양한 직업군의 친일인사 64명을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다시 역사 앞에 내세운다. 반민특위 활동이 중단된 뒤 꼭 60년 만이다. /선인·8만원. 김보근 기자
tree21@hani.co.kr
프랑스 뛰어넘은 68혁명 ‘시간여행’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68혁명 40돌인 지난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하자”고 말했다가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1968년 5월 칸대학과 파리대학 낭테르 분교의 학생 시위가 정부의 탄압을 받은 것으로 시작된 프랑스 전사회적인 변혁운동은 자유·평등 등 프랑스적 가치의 원천이자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8혁명이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 국한되지 않은 전지구적 현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은 68년 1월 말 베트콩 구정공세에서 69년 1월 런던의 대학 점거까지, 중국의 문화혁명에서 프라하의 봄까지 모든 사건이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서유럽을 넘어 미국,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운동세력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각국에서 발생한 24개의 사건 현장을 세밀하게 복원해낸다. 이 현장들을 보면 다양한 나라의 저항운동이 각기 특수한 진행 경로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주된 동원 요인은 어디서나 베트남전 반대였다. 하지만 68혁명이 진정으로 원했던 건 ‘상상력’이었다는 게 또한 지은이의 주장이다. “상상력이 권력을 인수한다”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등 68혁명이 쏟아냈던 구호들이 그걸 말해준다. 잉그리트 길허홀타이 지음·정대성 옮김/창비·1만5000원. 강김아리 기자
ari@hani.co.kr
우연 뒤에 숨은 ‘확률의 마법’
〈수학재즈〉
에이브러햄 링컨은 1847년에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고,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1947년에 의원이 됐다. 링컨은 1861년에 대통령이 됐고, 케네디는 1961년에 됐다. 링컨 비서의 성은 케네디였고, 케네디의 비서는 링컨이었다. 링컨의 뒤를 이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1808년에, 케네디의 뒤를 이은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08년에 태어났다. 이런 으스스하고 놀라운 우연의 일치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엉뚱하게도 <수학재즈>는 위와 같은 미스터리 괴담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수학 속 확률의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무작위로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 45명을 납치해 온다면, 이들 중 두 명 이상이 생일이 같을 것이다. 1024명을 상대로 주가 예측을 한다면, 10주 연속 주가 상승·하락을 예언해 1000달러를 벌 수 있다. 동전 앞면, 뒷면이 나올지로 동료와 점심 내기를 걸어 매번 밥을 얻어먹을 수도 있다. 우연의 일치와 ‘카오스’라는 삶의 불확실성을 ‘확률’이라는 마법 같은 수학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수학이 이렇게 유용한 학문이었던가 경탄하게 된다.
확률에서 카오스로, 종이접기에서 프랙털로, 뫼비우스의 띠에서 ‘4차원’ 클라인 병으로 고급 수학의 영역을 줄달음치는 데 복잡한 방정식 따위는 몰라도 좋다. 심지어 수학은 우리가 바지를 벗지 않고 속옷만 벗어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에도 숨어 있다! 학창시절 산수에 싫증날 대로 난 어른들을 위한 진짜배기 수학의 세계를 알려주는 ‘교양’ 수학서다. 에드워드 B. 버거·마이클 스타버드 지음, 승영조 옮김/승산·1만7000원.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만해·경허·일엽 등 ‘수행’ 철학적 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타자들〉
만해 한용운은 그동안 ‘승려 아닌 승려’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인과 독립운동가로 더 널리 알려진 때문만이 아니다. 사실은 그가 ‘신분만 승려였을 뿐, 유가 지식인이나 개화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런 해석은 그의 현실참여 의식과 과도한 구세(救世) 의식을 근거로 삼는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은 유학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하지만 신간 <한국근대불교의 타자들>은 이런 해석과 다른 입각점에 서 있다. 이 책의 지은이 박재현씨는 만해는 분명 승려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책에서 ‘만해는 근대를 대표하는 승려이며, 독특한 선의식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만해는 자신의 선의식을 두고 생전에 ‘선 밖의 선, 활선(活禪)’이라고 칭했다. 이런 그의 인식의 밑바탕을 짚어보면, 그가 추구한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은 구원자나 초월자가 아닌, ‘동류의식을 갖춘 보살행에 있다’는 게 지은이의 해석이다. 지은이는 만해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이런 그의 선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이렇듯 만해처럼 주류는 아니었어도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근현대 불교계의 ‘타자’들을 조명한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며 수행하다, 돌연 환속해 서당의 훈장이 된 경허, 근대 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 만공,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신여성에서 여승으로 변신한 일엽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 책은 특히 ‘큰스님’들의 사상과 행적을 중심으로 살핀 기존 불교계의 연구와 달리, 근대 불교계의 인물과 흐름을 ‘수행 전통에 대한 철학적 연구’란 관점에서 짚었다. 신여성과 불교, 비구승의 세력화 등 불교사의 이면을 드러낸 점도 돋보인다. /푸른역사·1만8000원.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18개 민족의 삶에 대한 ‘원형적 대답’
〈중국 소수민족 신화기행〉
땅과 하늘은, 해와 달은 어디서 왔을까. 과학이 명쾌한 답변을 마련해 주기 전, 오직 신화만이 대답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신화는 대답했다. 그래서 신화란 ‘자연과 인간’이라는 인류사적 주제에 대한 원형적인 대답이라 하는 것 아닐까. 과학의 시대에 신화는 무엇일까. 그것도 그리스·로마 신화만큼 화려하거나 다채롭지 않은 소박한 수준의 신화라면? 신화연구가 김선자씨는 답변을 구하기 위해 중국 구석구석을 찾았다. 그래서 <중국 소수민족 신화기행>은 신화 이야기이기 이전에 기행문이다. 중국에는 공식적으로 55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지은이는 이들 가운데 구이저우성의 먀오족(苗族)을 시작으로 모두 18개 소수민족을 찾아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관찰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온 삶의 방식이 자신들의 신화와 동화돼 있음을 발견한다. 먀오족은 인류가 단풍나무에서 태어났다고 믿으며, 파미르 고원의 타지크족은 말과 함께 천상에 쫓겨 내려왔기에 결코 말을 학대하지 않는다. 탄생과 죽음, 사랑과 같은 인간의 운명에 질서에 부여한 것도 신화의 몫이었다. 인류의 지혜는 신과 자연이 준 선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지은이는 신화를 “지혜로운 노인들이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옛 노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일 것을 권한다. 우리가 잊고 있는 소중한 가치가 아직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의 베이징이나 상하이는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고 한다. 서쪽과 북쪽, 동북부 변방의 숨은 곳을 지은이의 깔끔한 문체와 다양한 사진과 함께 따라가 보는 재미는 이 책의 덤이다. /안티쿠스·2만1000원.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하이데거 연구자가 본 전태일·숄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
이은주(한국외국어대 강사)씨의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실존철학에 관한 지은이의 숙고가 밴 연구서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을 기본 텍스트로 삼은 이 책은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이냐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산다는 것’의 의미는 ‘죽는다는 것’의 의미와 필연적 관련을 맺고 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인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죽음과 마주서 보아야 한다. 그럴 때 “인간 현존재를 그 근원적 전체성에서부터 열어 밝힐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지은이는 스스로 죽음을 감행한 사람들의 경우를 살핀다. 청계천에서 분신한 전태일과 나치에 항거하다 사형당한 조피 숄이 그런 경우인데, 이들은 스스로 죽음에 전 존재를 내맡김으로써 ‘순명’한 이들이다. “나는 전태일의 죽음이 결코 절망의 끝에서 더는 갈 곳 없었던, 최후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절망한 것이 아니라, 도래의 차원에서 타오르는 해방의 불꽃을 보았던 것이라고 이해한다.” 조피 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이는 억압과 폭정이 판치는 어두움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극복된 세계가 드리우는 빛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이는 오롯하게 죽음의 길로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내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죽음을 함께 겪으면서 지은이는 죽음을 향한 내맡김과 결단을 하나로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내맡기는 결단 속에서 삶의 본래적 가능성이 열린다고 그는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