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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는 마릴린의 통역사 앨리스 킴이에요”

등록 2009-07-30 18:45수정 2009-07-30 19:27

1954년 2월 한국을 방문한 마릴린 먼로가 미군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가운데 작은 사진은 당시 대구 미공군기지를 방문한 먼로와 한국 배우 백성희씨.  <한겨레> 자료사진
1954년 2월 한국을 방문한 마릴린 먼로가 미군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가운데 작은 사진은 당시 대구 미공군기지를 방문한 먼로와 한국 배우 백성희씨. <한겨레> 자료사진
이지민 장편소설 ‘나와 마릴린’
주한미군 한국인 여성 통역사 이야기
불륜·배신·전쟁…파란만장 인생사
1930년대 경성을 무대로 한 소설 <모던보이>의 작가 이지민(35·사진)씨가 이번에는 6·25 전쟁을 전후한 무렵을 배경으로 삼은 새 장편 <나와 마릴린>(그책)을 내놓았다.

이 소설은 1954년 2월 주한미군 위문공연차 방한한 마릴린 먼로의 한국인 통역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먼로의 새 포스터를 보내 달라며 주한미군 병사가 20세기 폭스사 관계자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되는 소설에서 금발의 섹스 심벌 먼로의 존재는 과연 이채롭게 빛난다. 서울공항에서 그의 도착을 기다리며 난동에 가까운 법석을 떠는 미군 병사들과 기자들, 그의 공연이 펼쳐진 대구와 포항의 미군 부대와 병원에서의 마찬가지로 열광적인 반응 등은 먼로와 한국이라는 이질적인 두 존재가 마주치는 특별한 순간들을 실감나게 되살린다.

그러나 <나와 마릴린>이 마릴린이라는 특별한 손님의 존재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작품은 아니다. 그가 출연한 영화들에서와 달리 여기서 마릴린은 그의 통역을 맡은 ‘나’의 이야기를 부각시키는 조연으로 등장할 따름이다. 본명인 김애순보다는 영어 이름 앨리스로 더 자주 불리는 ‘나’가 전쟁을 전후해서 겪거나 저지른 일들, 그가 느끼는 배신감과 죄책감, 그의 욕망과 절망이 소설의 핵심을 이룬다.


작가 이지민(35)씨
작가 이지민(35)씨
“맥주로 감은 은빛 새치머리를 자주색 도트 스카프로 가리고, 검은 모직코트에 구두코가 닳은 짙은 청색 비로드 슈즈를 신은, 장례식장의 검은 미사포처럼 근접할 수 없는 레이스 장갑을 낀… 나… 앨리스… 앨리스 J. Kim… 이국의 소녀가 단지 지겹다는 이유로 버린 인형과 흡사한 나를 저들은 좋아하지 않는다.”(13쪽)

소설 도입부에서 주인공 앨리스는 예사롭지 않다기보다는 다소 괴팍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튀는 외모와 차림은 전쟁 중에 그가 겪은 끔찍한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고 그 전후 사정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어쨌든 마릴린 먼로의 방한을 코앞에 둔 1954년 2월 현재, 앨리스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다. 사정은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여서 앨리스 역시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기는커녕 그는 “그저 사람들이 아플 뿐이다.”(26쪽) ‘사람들이 아프다’고 표현되는 대인기피증 역시 전쟁 중에 그가 겪은 참상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때문에 앨리스는 매일 아침 “죽음을 생각하며 출근을 한다.”(12쪽)

그가 출근하는 곳은 미군 부대이고 그는 미 공보원의 번역 및 통역요원 신분이다. 동경 유학 중 해방을 맞았던 그는 비슷한 일을 전쟁 전부터, 그러니까 미군정 시절부터 해 왔던 터. “나는 창녀가 아닌데도 미군으로부터 돈을 받는 얼마 안 되는 놀라운 여자였다.”(61쪽)


“나는 마릴린의 통역사 앨리스 킴이에요”
“나는 마릴린의 통역사 앨리스 킴이에요”
이 놀라운 여자가 반도호텔의 엘리베이터에서 그보다 더 놀라운 운명의 남자와 마주친다.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한 엘리트 번역가 겸 작가 여민환이 그 남자. 역시 미군정 공보처에서 일하던 유부남인 그와 앨리스는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그것은 전쟁이 나던 해인 1950년 초까지 이어진다.

그 관계에 금이 간 것은 앨리스가 민환의 친구인 조셉과 동침하는 장면을 민환에게 들키면서였지만, 둘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은 사건은 따로 있었다. 냉정하게 돌아선 민환에게 복수하고자 앨리스가 민환의 본처에게 장난 삼아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어 전쟁통에 민환의 처와 딸 성하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것이다. 게다가 인민군의 퇴각에 따라 북으로 끌려간 앨리스가 그곳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겪은 악몽과도 같은 일들은 그의 심신에 회복할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성하 모녀의 비참한 죽음과 흥남부두 탈출 장면의 압도적인 묘사, 인민군 첩보원 림복훈과 대결하는 장면의 흥미진진한 긴장감 등은 이야기꾼으로서 이 작가의 재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함께 “여자는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외로워진다”(27쪽)라거나 “가혹한 현실에는 더 가혹한 농담만이 친구가 될 수 있다”(192쪽)와 같은 적실한 경구들은 책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한다.

최재봉 문학전문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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