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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편집자가 절반 이상 뜯어 고친 ‘카버 소설’

등록 2009-08-06 19:18수정 2009-08-0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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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 대신한 미 소설 편집자
미 단편소설 대가 레이먼드 카버작품 ‘편집자 창작설’
‘초심자들’-‘사랑을…’ 원본-편집본 동시 출판돼 화제
편집자 첨삭 70% 이상…결말까지 바뀐 ‘재창작’ 다수
카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하층민들이다. 알코올중독과 가정불화 및 이혼 등에 시달린 카버 자신의 개인사가 소설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카버의 소설에서 이런 소재와 주제보다 더 특징적인 것은 단순하고 평이한 어휘들과 절제된 문장 같은 형식적인 요소들이다. ‘미니멀리즘’이라 표현되는 카버 소설의 이런 형식적 특징은 작가 쪽의 감정 노출을 최대한 자제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의 누선과 통점을 자극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런데, 카버 소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이런 특징이 카버가 아니라 편집자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의 진원지는 카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저작권자이기도 한 테스 갤러거. 갤러거는 특히 카버의 출세작인 두 번째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1981)의 경우 카버 자신의 최초 원고와 편집자가 손을 댄 최종 원고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면서 카버 자신의 최초 원고 형태를 그대로 살린 ‘원본 소설집’ <초심자들>(Beginners)을 오는 10월에 따로 출간하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 문학의 고전을 펴내는 비영리 출판사 ‘미국의 도서관’(Library of America)이 새로 낸 카버 소설 전집에 <초심자들>을 <사랑을 말할 때…>와 나란히 수록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카버의 원본과 편집자의 손을 거친 최종본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논란이 확산될 조짐이다. 영국 신문 <더 타임스>의 서평 섹션인 <더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The Times Literary Supplement) 최신호는 두 버전을 비교한 평론가 제임스 캠벨의 장문의 서평을 실음으로써 이번 논란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했다.

이 글에 따르면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의 편집자 고든 리시는 이 책에 수록된 <미스터 커피와 수리공 양반>의 경우 원본의 78%를 삭제했으며, <목욕> 역시 비슷한 정도로 줄였고, <봉지>는 70% 정도의 삭제 과정을 거쳤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17편 대부분이 원본에 비해 절반 정도로 줄어든 채 세상에 소개됐다(그 결과 미국의 도서관 판 전집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103쪽을 차지하는 데 비해 <초심자들>은 204쪽에 이른다). 편집자의 작업은 단순히 늘어지는 이야기의 곁가지를 쳐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물들의 이름과 성격, 옷차림과 대사 및 작품의 결말과 주제까지 과감하게 바꾸는 데에로 나아간 것으로 파악됐다. ‘편집자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만한 정황인 것이다.

생전의 카버 역시 편집자의 ‘과도한 개입’에 불만을 표하고 항의를 제기했던 일이 있다. 1980년 7월 8일자로 편집자 리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버는 “지금처럼 편집된 형태로 책이 나온다면 나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것”이라며 “지금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으면, 지금 일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앞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1주일이 지나지 않은 7월 14일자 편지에서는 리시의 편집 버전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세 번째 소설집 <대성당>을 작업하던 1982년에는 리시를 가리켜 “최고의 편집자”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한국의 문학출판과 미국 문학출판 사이의 가장 큰 차이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편집자의 능동적인 구실이다. 작품의 구상과 집필 단계에서부터 작가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작가한테서 넘겨받은 원고에 과감한 첨삭을 가하는 편집 시스템을 한국의 문학출판 역시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카버와 편집자 리시의 사례는 작가와 편집자의 경계에 대해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지게 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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