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중세사 쓴 최정은씨
‘왜 하필이면 중세일까, 그것도 서양사 중세를?’
최근 <동물·괴물지·엠블럼 중세의 지식과 상징>과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휴머니스트 펴냄)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 2권을 낸 최정은(36·홍익대 박사과정·미술사)씨한테 이런 물음부터 던진 것은, 그가 서양 중세사의 번역자가 아니라 저술자라는 사실이 색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국내 연구자가 유럽 중세를 주제로 다룬 책은 드물다. 중세는 ‘암흑기’ 정도로 홀대 받는 게 현실 아닌가. 게다가 중세사 개론이 아니라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미시역사다.
그가 중세의 억울함을 적극 변론한다.
“흔히 중세와 근대는 명백하게 단절됐다고 여깁니다. 또 중세는 암흑기이고 르네상스는 인문주의라는 도식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이해하기로 중세는 지적 암흑기가 아니라 도리어 지적으로 매우 활발했고 자본주의적 사고의 씨앗인
‘물화’ 사고방식도 중세 신학에서 발견되지요.” 그는 “근대성과 오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잃어버린 중세의 기억을 복원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세를 들여다보는 그의 창은 독특하다. 중세 사람들이 즐겨 읽었다는 사료 <동물지> <괴물지> <엠블럼집>를 통해 중세의 의식, 상징, 은유, 환상, 수사학을 끄집어내어 중세와 오늘의 대화를 시도한다. 거기에는 ‘고삐 풀린 상상력’이 풀어놓는 중세적 팬터지의 이야기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로베르토 베니니의 <몬스터> 등 오늘의 영화·애니메이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용, 유니콘, 인어, 켄타우로스 등 잡종 괴물들의 기괴한 그림과 문양들이 풍부한 볼거리로 담겼다.
팬터지, 애니메이션, 만화의 상상력으로 이런 책을 쓴 동기가 궁금하다.
“공부하는 미술사와도 관련이 있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만화를 무척 좋아해 팬터지와 상상에도 개인적 관심이 컸고요.” 3~4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거의 1년 동안 글을 썼다고 한다.
또 다른 책 <트릭스터>는 역사와 세상을 바라보는 지은이 최씨의 시각을 드러내는 책이다. 우리말로는 장난꾼, 사기꾼, 어릿광대 등으로 옮길 만한 ‘트릭스터’는 늘 한 시대 문화양식의 규범을 깨고 새로운 규범을 만들면서 그 장을 바꾸거나 확대하는 존재다.
최씨가 ‘문화영웅’으로 이해하는 트릭스터는 “웃음과 기쁨을 가져오는, 왕이자 광대이며, 사도이자 매개자이며, 웅변가이자 은둔자이고, 현인이자 바보이며, 방랑자이자 혁명가이다. 그래서 그는 한계선에 선 유목민이다.” 예컨대 고대의 가면극에서, 중세시대에 성당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신성모독적 당나귀 축제에서, 유럽 민담의 주인공인 바보 한스와 이반의 이야기에서 원초적 인간성을 지닌 트릭스터는 “흉내내고 익살떠는” 신화의 원형으로 제시된다. 때로는 신화와 민담 속에서 욕망과 탐욕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두 아이의 엄마인 최씨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난 5년 동안 혼자서 관련 분야를 공부하다가 올해 초에 다시 박사과정에 들어가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사를 연구 중이다. “철학자 세르가 한 말이 있어요. 부지런히 공부하고 마음껏 살고, 감각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 도서관을 떠나고, 책을 덮으라고 말합니다. 결국 책보다는 삶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글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