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량화 혁명
\\
먼저, 책 읽는 재미를 만끽하려면 우리의 상식에서 잠시 벗어나자.
눈에 보이는 의자·사과를 5개, 10개 등 숫자로 세는 일은 쉽겠지만, 눈에 띄지 않는 뜨거움, 밝음, 무거움, 빠름, 단단함도 수량으로 정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기는 쉽잖은 일이다. 그래서 차갑다, 따뜻하다, 뜨겁다고 말하는 시대와 그것을 섭씨 0도, 30도, 80도로 말하는 시대 사이에는 실로 건너기 힘든 사고방식의 혁명, 세계관의 혁명이 필요하다.
<생태제국주의>의 지은이로 널리 알려진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는 <수량화 혁명>(심산 펴냄)에서 이런 수량화 혁명이 중세 13, 14세기에 이미 시작됐으며 그것이 ‘태양이 지지 않는’ 지구적 영토확장을 이룬 19세기 유럽 제국의 패권을 가져왔다고 보여준다. 이 책은 “유럽 제국주의가 어떻게 그렇게 놀라울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평생의 연구주제로 삼은 크로스비의 유럽 제국주의 연구 세 번째 저작으로 1250~1600년의 시대를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서구 유럽 사회는 1250년부터 1600년 사이에 시·공간과 음악, 미술, 부기 등 인간활동에서 질적 차이를 강조하던 ‘질의 세계관’에서 수량의 관계를 강조하는 ‘양의 세계관’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이 가운데에서도 1250~1350년,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14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기적과도 같은 수십년”은 너무도 커다란 사고방식의 혁명이기에 “20세기가 오기 전까지 이 반세기에 필적할 만한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며 이 시대의 중요성을 그는 강조한다.
1250~1600년 서구 유럽
측정 어려운 ‘감각’계량화
원근법 · 기계시계등 발명
‘질→양’으로 세계관 이동 “기적과도 같은 수십년”에는 누군가에 의해 유럽 최초의 기계시계와 대포가 만들어졌고, 해도와 원근법, 복식부기가 등장했다. 무지개의 각도를 측정하는 과학실험이 행해졌고 기하학에 의한 원근법의 그림이 그려졌고 “정확하게 계량된 노래”가 작곡됐다. 시간과 공간, 음악, 미술, 부기에서 일어난 수량화는 중세인들한테 참신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예를 들어 14세기에 옥스퍼드대학 머튼 칼리지의 학자들은 크기뿐만 아니라 움직임, 빛, 열, 색깔 등 포착하기 까다로운 성질들까지 계량함으로써 얻는 이점을 알게 되자 이에 고무되어 확실성, 덕성, 우아함 등을 수량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하기 시작했다.”
크로스비는 ‘유서 깊은 모델’과 ‘새로운 모델’이라는 중세의 두 가지 세계관으로 이런 수량화 의식의 대이동을 설명한다.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전적 세계관인 ‘유서 깊은 모델’에서 우주는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고 모든 지상의 공간은 그 중심인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질적으로 구분된다. 시간도 역시 예수의 십자가형 이전과 이후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근대 과학혁명의 세계관을 예비하는 ‘새로운 모델’은 기계시계의 발명과 해도의 등장으로 도덕과 가치가 담긴 시간과 공간의 질적 차이를 제거한다. 이런 변화는 수학, 천문학, 군사학 뿐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에도 이어지며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인들의 사고방식(망탈리테)에 새로운 세계관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입으로 소리내어 읽던 낭독의 시대에서 속으로 혼자 읽는 묵독의 시대가 오면서 덩달아 묵독에 알맞은 ‘시각화’의 문화가 강조되고, 이에 따라 수량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크로스비의 해석은 새롭다. 그래서 시각화는 ‘혁명의 충분조건’이자 “성냥을 긋는 일”이다. 서구 유럽의 중세에서 일어난 수량화 의식혁명에 대한 크로스비의 연구는 서양사를 좀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중세에 과학혁명의 고유한 씨앗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지나치게 단순화될 때에는 ‘유럽은 본래 특별한 존재’라는 유럽중심주의 사관을 전할 우려도 있을 듯하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측정 어려운 ‘감각’계량화
원근법 · 기계시계등 발명
‘질→양’으로 세계관 이동 “기적과도 같은 수십년”에는 누군가에 의해 유럽 최초의 기계시계와 대포가 만들어졌고, 해도와 원근법, 복식부기가 등장했다. 무지개의 각도를 측정하는 과학실험이 행해졌고 기하학에 의한 원근법의 그림이 그려졌고 “정확하게 계량된 노래”가 작곡됐다. 시간과 공간, 음악, 미술, 부기에서 일어난 수량화는 중세인들한테 참신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예를 들어 14세기에 옥스퍼드대학 머튼 칼리지의 학자들은 크기뿐만 아니라 움직임, 빛, 열, 색깔 등 포착하기 까다로운 성질들까지 계량함으로써 얻는 이점을 알게 되자 이에 고무되어 확실성, 덕성, 우아함 등을 수량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하기 시작했다.”
크로스비는 ‘유서 깊은 모델’과 ‘새로운 모델’이라는 중세의 두 가지 세계관으로 이런 수량화 의식의 대이동을 설명한다.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전적 세계관인 ‘유서 깊은 모델’에서 우주는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고 모든 지상의 공간은 그 중심인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질적으로 구분된다. 시간도 역시 예수의 십자가형 이전과 이후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근대 과학혁명의 세계관을 예비하는 ‘새로운 모델’은 기계시계의 발명과 해도의 등장으로 도덕과 가치가 담긴 시간과 공간의 질적 차이를 제거한다. 이런 변화는 수학, 천문학, 군사학 뿐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에도 이어지며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인들의 사고방식(망탈리테)에 새로운 세계관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입으로 소리내어 읽던 낭독의 시대에서 속으로 혼자 읽는 묵독의 시대가 오면서 덩달아 묵독에 알맞은 ‘시각화’의 문화가 강조되고, 이에 따라 수량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크로스비의 해석은 새롭다. 그래서 시각화는 ‘혁명의 충분조건’이자 “성냥을 긋는 일”이다. 서구 유럽의 중세에서 일어난 수량화 의식혁명에 대한 크로스비의 연구는 서양사를 좀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중세에 과학혁명의 고유한 씨앗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지나치게 단순화될 때에는 ‘유럽은 본래 특별한 존재’라는 유럽중심주의 사관을 전할 우려도 있을 듯하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