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변화 꿰뚫어 본 이븐 할둔
〈이븐 할둔, 역사의 탄생과 제3세계의 과거〉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역사학의 창시자라면, 중세 아랍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이븐 할둔(1332~1406)은 역사학을 과학과 철학의 반열에 끌어올린 사상가다. 그가 남긴 <성찰의 책>의 권두 격인 <역사서설>은 역사 서술의 방법론을 넘어 사회의 형성과 변화의 법칙을 파악해낸 명저로 꼽힌다. <이븐 할둔, 역사의 탄생과 제3세계의 과거>는 그로부터 600년 뒤에 태어난 모로코 출신의 지정학자가 이븐 할둔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한 책이다.
지은이는 제3세계와 저개발 문제를 고찰하던 중 이븐 할둔의 저작에 주목했다. 이븐 할둔은 14세기 마그레브(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 등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 지역의 급작스런 쇠퇴는 사하라 사막 이남과의 금 교역이 끊기면서 물적 토대가 무너졌기 때문으로 파악했다. 그런 조건의 오랜 축적이 훗날 서구의 식민지배와 저개발로 이어진 셈이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이븐 할둔의 역사 해석에 나타난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적 개념을 추출해낸다. “세계를 각기 고립된 대상들의 우연한 축적으로 보지 않”고, “필연과 우연,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분리”했으며, 외부 요인보다 내적 모순을 강조한 태도가 그렇다. 지은이는 1966년 이 책의 초판을 쓴 지 32년이나 지난 1998년에 재간을 결심한다. 그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는데도 개정판이 아닌 초판 그대로 재간한 것은 “이 책이 아직도 이슬람주의든 유럽인종주의든 신구 몽매주의를 반박하는 논증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브 라코스트 지음·노서경 옮김/알마·3만3000원.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뉴라이트 역사관 집중해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
2008년, 정권 교체의 여파는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으로 옮겨붙었다. 뉴라이트 등이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으로 왜곡됐다며 수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수구 인사들이 역사왜곡을 바로잡는다며 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하고, 교과서 필자들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강제 수정까지 이뤄졌다. 이에 ‘전국역사교사모임’ ‘한국역사연구회’ 등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훼손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같은 해 열었던 ‘한국 근현대사 특강’을 책으로 옮겼다.
책은 한국 근현대사의 뜨거운 쟁점을 가려뽑았다. ‘반성 없는 친일파들의 역사전쟁’, ‘자생성을 부인하는 식민사관’, ‘이승만은 왜 단정운동을 벌였나’,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북한 현대사, 어떻게 볼 것인가?’ 등등. 한홍구·정태헌·이만열·서중석·정영철 등 역사학계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민주화는 친일파에 의해 왜곡된 국가 정체성을 바로잡는 과정이다. 우리 현대사는 그 굴곡에 대한 솔직한 기록이어야 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책은 심층적이고 명쾌한 분석으로 정곡을 찌른다.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게 아니라, 민족적 양심을 가진 세력이 친일파한테 ‘역청산’을 당한 겁니다.”(한홍구), “깡패가 일제시대 때 많이 생겨났거든요. 일제 지배가 아니었다면 깡패가 생겨나지 않았을까요?”(정태헌), “일제 강점기에 국가를 뺏겼다고 해서,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했는데 어떻게 건국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느냐.”(서중석) 강의를 책으로 옮겨, 마치 현장 강의를 듣는 듯 술술 잘 읽힌다. /철수와 영희·1만3000원. 김순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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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지적 아카이브 추적
〈촘스키 이펙트〉
새삼 노엄 촘스키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위대한 석학이면서 동시에 현실 비판과 사회 참여에 앞장선 친숙한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쉼 없는 그의 반항’은 줄곧 세상의 주류, 지배권력의 심장을 겨눠왔다. 그래서 종종 외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진실을 도둑맞고 사는 약자들에겐 열렬한 지지의 대상이다. 그 역시 비주류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20세기 내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커다란 위협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촘스키의 책을 읽으라”고 권한 적이 있다.
촘스키의 무엇이 그토록 차베스를 매혹시켰을까? 그 실체는 진실을 향한 촘스키의 끊임없는 지적 성찰에 있다고 단언한다. “나는 (스포츠나 영화 같은) 사회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일을 함으로써 내 성실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책임을 훼손하는 거야. 진실을 말하면서 거짓을 폭로해야 돼, 그게 내 임무야.” 이 책은 세계가 촘스키로부터 어떤 자양분을 얻어 뿌리를 튼튼히했는지 살피고 있다. ‘영향력과 파급효과로 본 촘스키 평전’쯤 될 법하다. 저명한 촘스키 연구자인 저자는 무려 10년의 공을 들여 록 음악부터 영화·연극은 물론 정치·법률·교육·인권·미디어·문학 등 분야에서 그의 지적 유산을 추적했다. 아나키스트, 데카르트 학파, 자유주의자와 급진좌파 등 촘스키에 영향을 끼친 사상의 이력도 더듬었다. 로버트 바스키 지음·이종인 옮김/시대의창·3만5000원.
이재명 기자
miso@hani.co.kr
이국땅의 이복 자매를 찾아…
〈안녕, 엘레나〉
김인숙의 소설집 <안녕, 엘레나>는 가까운 가족을 잃거나 버린 이들의 눈물과 한숨, 탄식과 신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표제작에서 원양어선 선원 출신 아버지의 딸인 주인공은 해외여행을 떠나는 친구에게 한가지 부탁을 한다. 아버지가 이국땅에 버리고 온, 엘레나라는 이름의 이복 자매를 찾아 달라는 것. 원양어선을 타며 무책임한 수컷으로서 방종한 삶을 살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고 집에 들어앉은 뒤 세상을 두려워하며 소극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주인공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을 뒤늦게 후회하며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한다. <조동옥, 파비안느>의 여주인공은 이혼한 직후 자신을 아버지에게 떠맡기고 브라질로 떠났던 어머니가 환갑을 한 해 앞두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어머니는 주인공이 열여섯 살이었을 때 낳은 아이를 그녀 몰래 ‘처분’한 바 있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 앞에 주인공은 새삼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를 향한 미안함과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숨-악몽>의 주인공은 아버지를 살해하는 악몽을 꾸는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그 자신이 아기였을 때 이미 살해당했으며 지금의 그는 단지 유령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내와 딸을 미국으로 보내고 한 달에 며칠씩을 공중에서 보내는 파일럿을 등장시킨 <현기증>은 드물게 아버지의 시점에서 해체 위기의 가족을 조망한다. 이 주인공이 가족과 함께 한 중국 동굴 여행에서의 따뜻했던 기억을 그리워하는 장면은 앞선 작품의 주인공들이 먼저 죽은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미안한 마음을 품었던 것에 대응하는 것 같다. /창비·9800원.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관광객 200만’ 남이섬 경영비결
〈남이섬 CEO 강우현의 상상망치〉
‘주식회사 남이섬’의 강우현 사장이 한해 200만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비법을 그만의 유쾌한 입담으로 들려주는 책이다. 제목부터 재치가 있다. 상상망치는 톡톡 치면 팍팍 나올 것 같은 아이디어 발굴 도구다. 아이디어에 관한 그의 생각은 명료하다. “안 된다는 생각부터 버려라.” “가능성을 믿으면 상상은 현실이 된다.” 무조건 상상한 것들을 해보라는 얘기다. 별다른 상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남 하는 일 반대로만 해도 아이디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황폐해져 가는 모래섬을 생명의 섬으로 탈바꿈시킨 동력이 됐다. 배운 것 버리고, 가진 것 뒤집으니 저절로 아이디어가 생겨나더라라는 익살스런 상상놀이 경영법. 책은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림동화 작가로 활동하던 그가 10년 전 경영난에 허덕이던 남이섬 시이오를 맡아 펼친 상상경영 이야기들을 담았다.
아이디어맨 강우현의 상상놀이는 끝이 없다. 남 하는 일 반대로만 하다 보니 ‘역발상 경영’, 생각나는 대로 꾸미다 보니 ‘상상경영’, 버리는 것 다시 쓰다 보니 ‘창조경영’이라고 불러준단다. 남이섬에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것들이 훌륭한 창작 재료가 된다. 버려진 소주병은 벽화 소재, 건축 폐기물은 조형물이 된다. 책 축제가 열리고, 자연을 벗삼는 곳이 남이섬이다. 그의 말장난 같은 경영법은 남이섬을 한 해 20만명의 외국인이 찾는 국제적인 관광지로 돌려놨다. 강우현은 말한다. “남이섬은 달밤이 좋다. 그런데 별밤은 더 좋다. 하지만 새벽을 걷어 올리는 물안개를 마주하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남이섬에 오면 상상이 현실이 된다.” /나미북스·1만2000원. 홍대선 기자
hongds@hani.co.kr
조선 선비들 묘비명 57편
〈내면기행〉
지난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 남긴 유서에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의 소탈한 성품을 잘 보여주지만, 실제 비석이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무덤의 봉분을 겸한 그의 비석은 가로 2m, 세로 2.5m, 높이 40㎝로 ‘아주 작지는 않게’ 만들어졌다. 그의 묘비명(묘비글)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였다.
이런 유언을 그가 처음 남긴 것은 아니다. 조선 때의 명문거족이었던 달성 서씨 명응과 그의 손자 유구도 비슷한 묘비명을 남겼다.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은 “내가 죽은 뒤에 큰 공덕비를 세우지 말고 다만 ‘보만재 서아무개의 묘’라고 하면 충분하다”고 썼다. 판서를 지낸 서유구도 “내가 죽은 뒤에 우람한 비를 세우지 말고 그저 작은 비석에 ‘오비거사 달성 서아무개의 묘’라고 쓰면 족하다”고 적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였다.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가 지은 <내면기행>은 조선 때 이름난 선비들이 생전에 스스로 지은 묘비명 57편을 모았다. 여기엔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다가 천수를 마쳤다”는 여유로운 정승 상진, “사람됨이 보통사람 이하였다”는 겸손한 판서 정일상, “맑은 이름이 세상을 술렁이게 할 만하다”는 호방한 백호 임제, “끝내 머리 숙이지 않겠으며 마음으로 항복하지 않겠다”는 꿋꿋한 박세당의 묘비명도 들어 있다. 한때 유서 쓰기가 유행했는데,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써본다면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살아서 자신을 성찰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글들이다. /이가서·2만3000원. 김규원 기자
ch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