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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실존주의-구조주의 논쟁 촉발한 ‘그’ 책

등록 2009-10-16 20:56

〈변증법적 이성 비판 1·2·3〉
〈변증법적 이성 비판 1·2·3〉
사르트르 후기 대표작 50년만에 번역
20년 정치적 실천의 ‘사상적 응축’




〈변증법적 이성 비판 1·2·3〉
장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변광배·윤정임·장근상 옮김/나남·각 권 3만8000원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사진)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다. 프랑스 지식계를 뒤흔들었던 1960년대 실존주의-구조주의 논쟁의 진원이 된 저작이기도 하다. 1960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 1권(한국어판 1·2권) 출간 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사르트르 저서를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논쟁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 논쟁을 타고 이른바 ‘구조주의 시대’가 열렸다. 미완으로 남은 <변증법적 이성 비판> 2권(한국어판 3권)은 사르트르 사후인 1985년에 유고 상태로 출간됐다. 1권이 출간된 지 50년 만에 이 기념비적 저작 전체가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한국사르트르연구회 소속 전공자 네 사람의 공동 노력의 소산이다.

이 저작의 번역이 이렇게 늦어지게 된 것은 1400쪽에 이르는 원서의 방대한 분량에도 이유가 있지만, 한국의 사르트르 수용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1950년대 전후 상황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한국 지식인들의 황폐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지적 안정제 노릇을 했다. 전기 사르트르 사상을 대표하는 <존재와 무>(1943)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찍이 번역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그의 과격 좌익 활동이 알려지면서 ‘과격파 사르트르’가 외면받기 시작했고, 후기 사상이 집대성된 <변증법적 이성 비판>도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사르트르가 이 책을 쓴 것은 1957~1960년 사이 3년 동안이었다. 대작을 쓰는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건강을 잃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의 땅거미에 쫓겨 미친 듯이 글을 썼고, 각성제 코리드란을 끼고 살았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때의 사르트르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펜을 휘갈겨대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하루에 코리드란 한 튜브를 복용하기도 했다. 해질 무렵이면 그는 녹초가 됐다. 그는 가끔 모호한 제스처를 하기도 했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쓰고도 대작을 완성하지 못했고, 다만 건강을 되찾았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사르트르 후기 사상을 대표한다는 말은 곧 그의 후기 활동을 종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차세계대전 와중에 그는 현실 자체와 마주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첫 번째 개종의 경험’을 하게 된다. 종전 이후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소련의 ‘동반자’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52년 사르트르는 ‘두 번째 개종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공산주의와 자신을 거의 일치시켰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반공산주의자는 개다. 나는 평생 결코 공산주의에서 빠져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그는 다시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이후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바로 이 20년에 걸친 정치적 실천이 사상으로 응축된 작품이다.

이 저작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57년의 실존주의 상황’을 주제로 한 글을 써 달라는 폴란드 잡지사의 요청이었다. 거기에 응해 쓴 글이 이 책의 서두에 놓인 ‘방법의 문제’다. 170쪽 분량의 이 글이 사실상 결론에 해당하는데, 그 뒤의 본문은 이 결론에 이르는 긴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방법의 문제’는 원제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였는데, 이 제목이 주장의 요체를 좀더 쉽게 파악하게 해준다.


사르트르의 관심은 마르크스주의에 실존주의를 수혈하는 데 있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마르크스주의는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주체인 인간들 각각의 삶을 사물로, 대상으로만 취급할 뿐 살아 있는 실존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진단이었다. 세계를 창조하는 살아 있는 주체를 불러들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 창조의 주체인 인간에게 합당한 지위를 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런 구상에 입각해 이 책에서 세워나가는 것이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인간학’이다. 전기의 <존재와 무>가 나(개인)와 타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주제로 삼고 있다면, 이 후기의 대작에서는 그 개인이 집단적 주체를 이루어 역사적·사회적 지평에 선다. 이 인간 집단이 역사와 사회를 만들고 다시 역사와 사회가 인간 집단을 제약하고 형성하는 이중적 과정이 변증법적 과정이고, 이 변증법을 포착하는 이성이 ‘변증법적 이성’이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이 이성의 힘과 한계를 시험하고 탐구하는, 다시 말해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하는 저작이다.

그러나 이 웅장한 작품은 곧바로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출간 이듬해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 저서 <야생의 사고>의 한 장(‘제9장 역사와 변증법’)을 할애해 사르트르를 “자기 사유에 갇힌 포로”, 서구문화 안에 갇힌 존재라고 비판했다. 사르트르가 서구 문명인 사회만 ‘참된 변증법’의 대상으로 보고, 이른바 ‘미개사회’를 저차원으로 깔아뭉갰다는 것이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사르트르의 주체였다. 사르트르가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라고 보았던 그 주체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구조의 효과’, 곧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로 보았던 것이다. 옮긴이들은 구조주의 맹위에 밀려 사르트르의 주체가 모욕받은 채 후퇴했지만, 이제 그 구조주의도 퇴각한 마당에 사르트르의 주체는 다시 주목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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