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다시 읽는 마르크스경제학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냉전과 독재가 지배하던 1970~80년대 몰래 숨어서나 읽어야 했던 원서 한 권이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바로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다. 좌파 월간지 <먼슬리 리뷰>의 창립자이자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유명한 폴 스위지가 1942년에 쓴 이 책이 67년 만에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는 셈이다.
자본주의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지금 이 책은 시의적절하다. 또 1990년대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붕괴하고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했지만, 주기적으로 경기순환에 맞닥뜨리는 자본주의 모순과 불안정성의 원인을 규명하려 했던 카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화두는 여전히 현재성을 지녔다. 그 안내자로서 스위지는 탁월하다. 21세기 최고의 경제학자 가운데 한 명인 조지프 슘페터는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이론 체계를 훌륭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여러 나라의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시도를 했지만, 누구도 그만큼 잘해내지 못했다”고 격찬했다. 입문서라고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초가 없는 이들에겐 다소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읽는다면 책의 3부인 ‘공황과 불황’으로 바로 가도 된다. 스위지가 여기서 다룬 자본주의 공황의 본질, 이윤율의 하락 경향과 연계된 공황, 실현 공황, 붕괴 논쟁, 만성 불황 등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무관하게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되새겨볼 만한 문제의식들을 던져준다. 이주명 옮김/필맥·2만원. 류이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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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되었던 책들에서 다시 길찾기
〈청춘의 독서〉
열정 속에서 질주하다 문득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빠진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지도를 펴서 제 길을 찾아야 한다. 열렬한 운동권으로, 진보적 지식인으로, 그리고 정치인으로 열심히 달려왔던 유시민씨도 지금 잠깐 멈춰 섰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꺼내놓은 지도가 독특하다. 바로 청춘 시절 그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줬던 책들이다. <청춘의 독서>는 그가 젊은 날 읽었던 14권의 책에 대한 서평이자 독후감이다. 대학 시절 ‘지하서클’에서 읽었던 <전환시대의 논리>, 수배중인 선배가 보낸 유인물 속에서 발견된 <공산당 선언>, 수감중에 읽었던 <맹자>, 논산훈련소에서 접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 그 책들은 그와 젊음을 함께했고, 삶의 방향을 세우게 해준 것들이다. 그는 이 오래된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 읽으며, 그 책에 의지해 걸어온 인생길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점검해 나간다.
물론, 30년 가까운 세월을 사이에 두고 다시 접한 책은 그에게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혁명론자라고 생각했던 맹자에게서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발견하고, 목숨을 걸고 읽었던 <공산당 선언>에 대해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역사의 종착점으로 단언하는 것은 그 선언의 잘못된 점이라고 당당히 지적한다. 그동안의 세월의 무게가 그에게 좀더 넓게 보는 시야를 제공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청춘의 독서’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그는 여전히 ‘청춘의 그 마음으로 독서’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 ‘청춘의 마음’에서 나올 새 지도를 기대해본다. /웅진지식하우스·1만6000원. 김보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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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원주인은 인디언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알아도 한참 잘못 알았다. 민주주의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콜럼버스는 물론 그 후 미국에 온 서양인은 누구도 민주주의를 몰랐다”는 지은이. 우리는 미국 헌법이 유럽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시민민주주의를 잇는 것이라 배웠다. 하지만 그것이 서양 심판들이 내린 편파판정 탓이라니…. 흔히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건물로 미국 국회의사당을 든다. 중앙 돔 벽화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진 포카혼타스가 그려져 있단다. 인디언 민족장의 딸이 영국인 복장으로 세례를 받는 모습이다. 요컨대 유럽에서 온 서양인이 인디언에게 민주주의 문명을 전했다는 상징이다. 그러나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에서 “참된 역사는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 “당시 미국 헌법의 연방제를 비롯한 그 여러 민주적 원리는 인디언의 헌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 연방제나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인디언 외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헌법에 연방제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호데노소니족의 민족장인 카나사테고였다. 호데노소니의 정치철학은 국가와 지배자, 시장과 착취, 계급과 차별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자치, 자연과의 조화가 그 근간이다. 모든 부족 사람들은 민족장에 대한 ‘약탈’이 허용되었다. 민족장이 자기 물건이 없어진 것을 탓하면 즉시 모든 권력과 위신이 실추됐다. 이 때문에 누구보다 재산이 적고 가장 초라한 장식을 지닌 사람이어서 누구나 쉽게 그를 알아봤다. 문명이란 이름의 탐욕이 활개 치는 오늘, 이런 지도자를 어디서 찾을까? 박홍규 지음/홍성사·1만4000원. 최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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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닮은 파리의 ‘극과 극’
〈파리는 사랑한다, 행복할 자유를!〉
‘톨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 그리고 몽마르트르 언덕과 센 강, 에펠탑을 품은 파리는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다. <파리는 사랑한다, 행복할 자유를!>은 <문화방송> 이보경 기자가 1년 6개월 동안 파리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낸 에세이다. 책 제목만 보면 단순한 ‘여행기’ 같다. 하지만 정치, 역사, 교육, 노동, 인권, 언론, 인종, 여성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프랑스 비평서’에 더 가깝다.
지은이의 눈에 비친 프랑스는 어떤 나라일까? 개인에겐 유난히 관대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철두철미한 곳이다. 40년째 13층(37m) 고도 제한을 고집스레 지키고, 여자는 바지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판탈롱법’을 유지하는 나라. 자유와 예술, 문화의 도시 파리는 돈 한 푼 없이도 꽤 인간답게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동시에 1억원도 부족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지은이에게 프랑스는 대단히 환상적이거나 이상적인 곳이 아니다. 차라리 동병상련의 대상이다. 실제로 책 속의 파리는 한국의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나브로 피어나는 교육열과 사교육 전쟁. 서른여섯 살의 현직 우편집배원 정치인 ‘올리비에 브장스노 신드롬’은 ‘허경영 신드롬’과 겹친다. 세입자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집주인, 비주류인 흑인과 무슬림의 처지는 한국 이주노동자의 삶과 비슷하다. 지은이는 말한다. “프랑스인들은 어떻게든 갈등이 비등점을 넘지 않도록 타협하는 사회적인 지혜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에는 ‘희망’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해·1만3000원.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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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는 이유
〈트래픽〉
주말 나들이길에 꽉 막힌 도로. 치밀어 오르는 짜증. 그런데 옆 차선은 항상 차가 빨리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심리·과학 분야 글쟁이(저널리스트)인 지은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교통학’적 의문이 아니라, 심리·사회·문화·인류·경제학적 논리를 통해 도로 위의 질서를 분석해 들어간 것이다. ‘교통’이라는 일상적이면서 전문적인 분야에 천착하다 보니 자칫 가벼운 말재주에 그치거나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학술서로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 이 책 <트래픽>은 본문만 600쪽 가까이 된다. 하지만 지은이의 지적 성실성과 편안한 문체는 이럴 위험을 잘 피했다. 미국에서 인문·심리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는 점도 대중서의 자격과 일정한 완성도를 방증한다.
글이 물 흐르듯 미끄러져 가는 것은 질문을 적절히 던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친절한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는 이유를 묻고, 익명성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익명성이 조장하는 갖가지 폭력적 상황에 대한 일화를 덧붙인다. 개미의 세계에는 왜 교통 정체가 없는가, 연구 결과 개미들은 3개 차선을 사용한다. 전세계 어디나 출퇴근 시간은 왜 항상 1시간 안팎인가, 인류는 자동차 발명 이전부터 통근을 위해 1시간 정도를 할애하려 노력했다. 이동의 욕구와 집에 머물려는 욕구의 균형점이 1시간 안팎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지은이는 쉬운 질문을 던지고, 갖가지 연구 결과와 인터뷰, 사례, 적절한 비유를 통해 설득력 있는 지적 답변을 내놓는다. 톰 밴더빌트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김영사·2만9000원. 안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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