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의 반역
\\
\\
대중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저명한 스페인 근대사상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는 그토록 화가 났을까?
가세트 선생이 대중을 향해 쏟아붓는 인격 모독적 독설을 들어보자.
“바보 멍청이” “응석받이” “자만에 빠진 철부지” “상속자 행세만 하려 드는 상속인” “야만인” “배은망덕” “문화의 기생충” 등등…. 도무지 교양과 합리성이라고는 눈꼽만치라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존재 같다. 자유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의 성장을 상징하는 19세기 이후 이런 대중의 갑작스런 출현, “대중의 습격”은 그한테 일찍이 어떤 문화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이자 “가공할 현상”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잡지 <애틀랜틱 먼슬리>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이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현대 대중사회 분석의 중요한 참고서적이 된 책 <대중의 반역>(역사비평사 펴냄)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1930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에서 가세트는 20세기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대중의 사회를 문명사의 시각으로 분석하며 대중의 인간 유형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20세기에 갑자기 출현한 대중은 누구인가?
파시즘·대량산업 대열 선
20세기 막 등장한 ‘대중’
문명사의 시각 비판
평균·편의에 길들여진
오늘날 현대인 보는 거울로
가세트는 19세기의 자유민주주의와 과학기술 문명이 만들어낸 자동적 결과물이 그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대중은 문명의 혜택에 감사와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며 “문명이 만들어낸 장소와 시설을 차지한” 배은망덕의 존재다. 또 대중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개인들의 소수 집단과는 구분되는 ‘평균인’ 속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지적 게으름의 존재다. “대중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런 대중의 인간 유형은 노동자든 귀족이든 계층과 상관없이 그런 삶의 태도에 만족하며 사는, 토론과 대화를 거부하는 지적 폐쇄성 속에서 발견된다고 가세트는 말한다.
가세트의 대중 비판을 읽다보면 “유럽의 몰락”을 지켜보는 유럽 지식인의 ‘엄살기’마저 느껴진다. 보수주의의 흔적 또한 버릴 수 없다. 비판에는 직설과 과장법이 동원된다. 이런 직설과 과장의 논증에는 대중의 출현을 “야만인의 수직적 침입”으로 바라보는, 20세기 초 유럽 사상가의 위기의식이 담겨 있다.
“오늘날 유럽의 사회생활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대중이 완전한 사회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유럽이 이제 어느 민족이나 어느 국가, 어느 문화도 겪어보지 못한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대중의 반역이다.”
“만일 이런 유형의 인간이 계속해서 유럽을 지배하고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한다면, 30년 정도만 지나면 우리 대륙은 야만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대중은 지배자가 되었지만 문명을 맡을 만한 적임자는 결코 아니었다.
“대중은 삶의 계획이 없이 표류하는 인간이다. …아무 것도 건설하지 않는다.” 대중 앞에서 물질적 편의는 감사해야 할 문명의 선물이 아니라 “요구해야 할 권리”로 바뀌었다. 또 “대중은 항상 자신의 머리 속에 가득 쌓인 상투어와 편견, 지엽적인 생각이나 실속 없는 말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것들을 천진난만하다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하게 아무데나 들이댄다.”
“그 특징은 대중이 자신을 평범하지 않고 탁월하다고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평범함의 권리 혹은 권리로서의 평범함을 선언하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의 반역이란 인류의 철저한 타락과 다르지 않다.”
이쯤 되면 독자는 ‘가세트 선생님, 당신이 21세기의 대중을 보고서도 그런 혹독한 비판을 할 수 있는지요’라고 되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대중은 정치 조작의 대상이며 맹목적 대량소비·환경오염, 교양 없는 문화의 장본인으로 지목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풀뿌리 민주주의의 개척자이며 사생활 인권의 각성자이고 민주화의 주역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나 당시 가세트가 목격한 것이 주로 파시즘의 군중대열에 선 대중의 신념에 찬 얼굴이며 “유럽의 몰락”과 동시에 등장한 소비에트 정권과 미국의 대량산업 사회의 군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고, 또 지금은 자연현상이 된 대중사회가 서투른 ‘원시성’을 지닌 채 막 등장하던 시대에 성찰한 대중사회 초입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의 분석은 유익하다. 그래서 ‘평균’과 ‘편의’의 안위에 길든 현대인이 바로 가세트의 대중은 아닌지 다시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제2부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는 20세기 초 유럽 지식인의 불안한 미래 전망을 담고 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서고 미국이 성장하는 사이에 유럽의 권력이 몰락하는 상황을 보면서, 가세트는 ‘유럽통합’의 전망을 언급한다. “오직 대륙의 여러 민족집단으로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결정만이 유럽의 맥박을 다시 뛰게 만들 것이다.” 1930년에 출간된 이 책은 유럽통합이 ‘유럽의 세계 지배’를 그리는 오래된 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20세기 막 등장한 ‘대중’
문명사의 시각 비판
평균·편의에 길들여진
오늘날 현대인 보는 거울로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