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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유재산제 사라진 농업 공동사회를 꿈꾸다

등록 2005-06-02 16:28수정 2005-06-02 16:28

박혜영/ 인하대 영문과 교수
박혜영/ 인하대 영문과 교수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찾아 모험을 떠났던 콜럼버스는 1492년 마침내 지금의 쿠바 근처인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 섬에 도착하였다. 콜럼버스는 총 224일에 걸친 자세한 항해일지를 남겼는데, 그 속에는 자신이 난생처음 인디오(Indio)들을 대면했을 때의 놀라움이 잘 담겨있다. 10월11일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신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의 눈앞에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펼쳐졌다. 비옥한 평지인 섬은 온통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온화한 날씨에 갖가지 과일과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 섬의 원주민들은 거의 알몸이었고, 아름다운 몸매와 자태를 지녔으며, 온순하고 순박하였다. 이들은 무기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칼을 보여주자 아무것도 모르고 칼날 쪽을 잡았다가 손을 베기도 하였다. 이들은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백인들에게 먹을 것과 물을 가져다주며 섬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까지 해주었다. 콜럼버스가 대면한 이 신세계는 인간과 자연이 마치 ‘신의 품안에서’(In Dios) 사는 것 같은 그야말로 평화로운 지상낙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던 이 유토피아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황금과 노예를 약속했던 콜럼버스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도 한 휴머니스트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헨리 8세 때 추밀원 의원과 대법관직을 역임했던 토마스 모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콜럼버스의 신세계가 실제로 존재했던 지상낙원이었다면 1516년 출판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서구가 오랫동안 꿈꾸어온 가상의 이상세계였다. 그리스어의 ‘없다’(U)와 ‘장소’(topia)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유토피아’는 결국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혹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을 말한다. 그러나 바로 유토피아의 이런 ‘비현실성’이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현실세계를 비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됨은 물론이다. 모어가 유토피아 공화국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린 2부에 이어 군주제하의 영국현실을 비판한 1부를 쓴 것도 유토피아의 정신이 실제로는 바로 현실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우리 현실에 비춰볼 때 <유토피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경제생활에 대한 모어의 통찰이다. 1부에서 모어는 ‘유토피아’ 섬에 5년 간 살았다는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의 입을 통해 ‘인클로저’라고 불리는 영국의 유명한 농업말살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큰 이윤이 생기는 양모 생산을 늘리려고 많은 귀족과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농토를 목축지로 바꾸었다. 인클로저 정책으로 농부들은 선대부터 살던 정든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돌게 되었고, 농가는 허물어지고, 마을공동체는 사라졌다. 농사를 포기하자 당연히 곡물 값은 폭등하고, 거지가 된 많은 농부들은 굶주리다 못해 “처음엔 도둑이 되고, 다음에는 시체가 되는”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법은 언제나 약자에게 가혹하기 마련이기에 사소한 절도죄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결국 유순한 양(羊)이 돈 때문에 사람까지 먹어치우게 된 것이다.

도둑이 되고 시체가 된 농부들


반면 독과점 형태의 양모산업은 나날이 번창하여 부자들은 노동하지 않고도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고, 많은 일손이 필요했던 농토에는 결국 양치기 한 사람만 남게 됨으로써 실업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라파엘이 비판했던 것은 비단 500년 전 영국의 상황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농촌현실도 마찬가지다. 비옥한 농지들이 하루가 무섭게 상업용지로 바뀌고, 시장개방과 채무에 시달린 농민들이 농약을 먹고 자살한다. 빈부격차를 가속화하는 기업세계화에 반대하며 농업은 상품이 아니라고 농민들은 고통스럽게 절규한다. 한 국가가 생존에 필수적인 농업을 포기하고 교역위주의 상공업으로 돌아설 때 과연 누가 그 과실을 챙기고, 누구에게 큰 고통이 따르는지 모어는 영국현실을 빗대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유토피아 시민은 누구든 농업을 해야한다
부의 축척도, 화폐도 없다
따라서 블로소득도 없고 빈부격차도 있을수 없다

▲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의 주인공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가 5년 간 살았다는 유토피아 섬의 가상도(판화). 유토피아 섬의 중심지인 아마우로툼 시에 여러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며, 그림의 왼쪽부터 시작해 오른쪽으로 흐르는 아니드루스 강이 보인다.
이 점에서 보면 2부에 나오는 이상적인 섬나라 유토피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모어가 자급자족적 경제를 꼽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자급자족의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기반은 농업이다. 유토피아 인구의 90퍼센트는 하루 6시간씩 육체노동을 하는데, 그 유토피아 “시민이면 누구든지 하는 일이 바로 농업”이고, 여기에 덧붙여 직조나 목공 같은 생계에 필수적인 수공업적 기술을 익힌다. 이들은 “토지를 재산으로 여기기 않고 다만 그들이 경작해야 할 땅”이라고 생각한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유럽과 달리 두 가지 직업이 없는데, 하나는 변호사이고, 다른 하나는 상인이다. 유토피아의 법률은 실로 간단하고 쉬워서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 없고, 기본적으로 사유재산과 부의 축적, 화폐가 없기 때문에 상인도 있을 수가 없다. 유토피아에도 시장은 있지만 이것은 필수품을 교환하거나 가져오는 곳이지 화폐경제가 통용되는 곳이 아니다. 유토피아 섬에는 불로소득도 없고, 빈부격차도 있을 수 없다.

비록 노예는 존재하지만 이들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간통이나 다른 중죄를 지어 노예가 되며,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다시 시민이 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경제적 특권계급도 존재하지 않고, 연장자가 존중받는 대가족 생활을 하면서, 모두 인간영혼의 불멸성을 믿고, 현재의 삶이 사후의 상벌로 이어진다는 겸손함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결핍의 공포가 없기에 축적의 욕망이 없으며, 금, 은은 희소가치가 없기에 그러한 것을 소유하거나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도 없다. 금과 은은 생존에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주로 요강이나 노예들의 쇠사슬로 쓰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런 헛된 욕망을 갖지 않도록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자연은 흙, 공기, 물처럼 가장 귀중한 천혜의 물질은 일부러 눈앞에 드러내 놓았으면서도,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어 두었다”고 믿는다. 도살과 사냥과 전쟁을 싫어하고, 교육과 독서를 중시하며 겸허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모어가 그린 이상사회에도 약점은 있다. 유토피아 공화국은 그 필요에 따라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삼기도 하고, 전쟁을 하게 되면 용병을 동원하는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토마스 모어가 아무리 뛰어난 도덕적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유럽인으로서 그가 벗어날 수 없었던 유럽중심적인 인식론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경제독점은 왜 견제하지 않는가

토마스 모어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 지 약 500년이 지났다. 그동안 서구제국주의는 세계 도처에 실제로 존재했던 지상낙원은 모두 허물어뜨리고 가상의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근대문명을 이룩해왔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유토피아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정치적으로 권력의 독점은 경계해왔으면서도 경제적인 부의 독점현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개인능력에 따른 결과라고 관대히 받아들여왔다. 정치권력의 억압과 횡포에는 저항하면서도 경제적 불평등의 현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부자들을 따라잡으려고 애써왔다. 어째서 정치권력은 제한을 받아야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경제적 축적에는 한계를 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어째서 정부는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기업의 독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에게 부(富)의 유토피아를 약속하지만, 이것은 마치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한쪽으로만 부를 쏠리게 할 뿐 결코 경제적 민주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오늘날 자본의 모래바람 속에서 파괴되고 죽어가는 자연과 사회적 약자들의 운명을 똑바로 보는 데,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대안을 꿈꾸는 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매우 유익한 길잡이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서평자 추천 도서

유토피아

토마스 모아 지음, 노재봉 옮김. 삼성출판사 펴냄(1976)(절판, 도서관에서 열람·대여)

유토피아

황문수 옮김. 범우사 펴냄(2003), 7000원

유토피아

김용일 역주. 계명대출판부 펴냄, 6000원

50자 서평

◇ 김용일(48·계명대 철학 교수, <유토피아> 번역)

“나를 허물고 우리를 쌓는 개개인의 노력과 이상적인 제도가 조화를 이룬다면, 인류의 꿈인 유토피아는 더 이상 꿈이 아닌, 우리 삶 속에서 이뤄지는 현실이 될 것이다.”

◇ 오라이(인터넷서점 알라딘의 마이 리뷰에서)

“특히나 유토피아의 공유제도가 인상깊었다. 사회주의와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개인의 소유를 배제한 모든 재산의 국유화를 통해 사람들의 욕심을 없앰으로써, 필요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 권희정(33·상명사대부속여고 철학 교사)

“누구나 바라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평화와 지혜의 공동체. 이상국가 건설의 모범 설계도이자 현실 개혁의 날을 세운 상상 여행 다큐멘터리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공산당선언> <광기의 역사> <에밀>)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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