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 눈으로 본 죽음의 정치학
노무현 추모열기서 엿본 ‘대안 없는 애도’
민주주의 확장 이어지지 못한 원인 짚어
노무현 추모열기서 엿본 ‘대안 없는 애도’
민주주의 확장 이어지지 못한 원인 짚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산책자·1만4000원
잘못된 애도는 자아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용산참사로 인한 상실감을 추기경이나 <워낭소리>의 늙은 소에 대한 애도 행위로 극복하려던 대중의 빗나간 애도는 필연적으로 상실감과 슬픔을 더 키웠다. 그 결과 뒤이은 노 전 대통령 타계 때 대중은 더욱 폭발적인 애도를 표시했다. 정 연구원은 사회학자 뒤르켐의 종교적 집합의례 개념을 빌려, 노무현이라는 기표가 그의 자살을 통해 초월적 기의로 기능하면서 성화(聖化)됐다고 본다. 그것은 ‘탈정치화된 정치인’, ‘권력의 술수에 따른 정치적 희생양’, ‘바보 노무현’ 이미지로 재현됐다. 성화된 노무현은 물론 실재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양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 평택 대추리 진압, 재임 기간 23명의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노동자 탄압 등 ‘신자유주의’로 포괄할 수 있는 정책들을 노무현·참여정부의 한계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만 돌릴 수 있겠느냐고 정 연구원은 반문한다. 그럼에도 대중은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자 ‘원래 없던’ 성화된·이데올로기화한 그의 자질을 실재한 양 착각하고 그것을 상실한 것처럼 애도함으로써 결핍을 상실로 기만적으로 전이하는 우울증적 주체와 유사한 오류를 범했다. 이 모든 현상의 근원에는 이명박이 자리잡고 있지만, 노무현의 실재가 이명박과 얼마나 다르냐고 정 연구원은 묻는다. “우리는 대중들이 갖고 있는 노무현과 이명박의 이 기묘한 대칭구도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상화된 노무현의 이미지를 깨버렸을 때, 드러나는 실재의 노무현은 사실 이명박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나아가 지금 대중들은 노무현을 상실해서 우울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일로 인해 우울하기 때문에 노무현의 죽음을 상실로 인지하고 그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세계 내의 기호, 곧 노무현이라고 하는 상상의 이미지를 삼킨 것임을 말해야 한다. 우울증적 대중들은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노무현’ 또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지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실을 연기(演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민주주의의 회복을 끊임없이 연기(延期)하고 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애도의 집합의례를 수행하면서 상상의 도덕공동체를 만들었고, 반대자들과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서로 배제하며 포함하는 동치(同値)관계를 이루었다. 그 결과 피아의 이분법 속에 제3의 정치적 삶의 자리는 허용되지 않고 대안적 시선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졌다. 그렇게 해서 용산과 화물연대, 쌍용자동차의 희생자들은 잊혀졌다. 결국 대중이 잃어버린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민주주의이며 민주공화국의 이상이다. 이를 향한 대중의 우울증적 충동은 애도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합의례 형식으로만 살아남아 단지 광장에서 대중들이 모였을 때만 현존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현실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 “모든 죽음의 수행자, 이 시대의 지배적 구조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저항”을 촉구한 시인 송경동은 가장 단호하게 그런 입장을 견지한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적대시한다면, 파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로 행세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무의식적 보수성’ 극복과 자유주의적 법치 확립을 우선해야 한다고 한 박동천 전북대 교수는 노무현의 공도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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