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목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펴내
2000년 전 추방 당한 소수파들의 신앙 고백
권력이 된 한국 기독교의 폭력·배타성 ‘비판’
2000년 전 추방 당한 소수파들의 신앙 고백
권력이 된 한국 기독교의 폭력·배타성 ‘비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무미건조한 세 마디 선언으로 시작하는 <요한복음>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 가운데 가장 이질적인 문서에 속한다. 비의적 상징과 알레고리들이 가득할 뿐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심원함에서 어느 복음서도 <요한복음>에 견줄 만한 수준엔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이 문서를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지극히 속류적인 방식으로 소비해왔다. 불의한 권력과 밀월했던 그들에게 <요한복음>이란 텍스트는 부단한 사랑과 복종의 가르침을 통해 고통에 처한 민중을 ‘선한 양’으로 순치시키는, 말 그대로 ‘은혜로운 복된 말씀’의 보고였던 것이다.
<당대비평> 기획위원으로 활동중인 민중신학자 김진호 목사가 <예수의 독설>에 이어 2년 만에 내놓은 <급진적 자유주의자들>(동연 펴냄)은 <요한복음>에 대한 관념적이거나 속류화된 해석 체계를 낱낱이 해체함으로써 텍스트가 내장한 본래의 불온함과 전복성을 되살리려는 필사적 노력의 산물이다.
“<요한복음>은 태생부터 불온한 책이었습니다. 이 텍스트를 낳고 유통시킨 신앙공동체가 1세기 말의 예수파 무리들 가운데 가장 기이한 소수집단, 요즘 말을 빌려 얘기하자면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의 동아리였기 때문입니다.”
김 목사가 말하는 <요한복음>의 급진성은 1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 육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도드라진다. 여기서 ‘육’(肉)이란 그리스어 ‘싸륵스’의 번역어인데, 성화(聖化)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육체인 ‘소마’와 달리 오염된 몸, 너무 더러워서 정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적나라한 몸뚱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교회는 ‘소마가 된 말씀’을 자처했고, 성직자와 장로처럼 제도화된 직책을 수행하는 자들은 자신을 ‘승화된 육체’라 믿었다. <요한복음>과 주류 기독교의 불화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말씀(로고스)이 육(싸륵스)이 됐다’는 이 구절을 <요한복음>의 핵심 전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말은 ‘가장 거룩한 것이 가장 천한 것이 되었다’는 뜻인데, 달리 표현하면 ‘더럽고 추하고 천한 것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성스런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2000년 전의 이 불온한 진술에는 당시 <요한복음>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했던 한 아웃사이더 종교집단의 고통스런 체험이 끈적하게 녹아 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1세기 말 지금의 터키 서부에 위치한 어느 유대교 회당에서 폭력적으로 추방당한, 상처 입은 소수파 예수공동체의 진술이다.
“1세기 후반 반로마 항쟁이 처절하게 진압된 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 없어지고, 유대인의 신앙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합니다. 유대인들은 위협받는 집단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율법 체계를 정비하고 ‘증오의 정치’에 기반한 공격적인 유대교 재건 프로젝트를 가동하는데, 이때 ‘내부의 적’으로 지목돼 억압받고 추방된 자들이 유대교의 소수파로 남아 있던 예수 추종자들입니다.” 추방당한 예수공동체들은 생존을 위해 공동체 간 결속을 강화하고 스스로를 제도화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이들이 제도화의 전범으로 차용한 것이 유대교 공동체의 회당 모델이었고, 공동체 간 연대를 위해 채택한 것이 ‘열두 사도’ 담론이었다. 김 목사는 <요한복음>을 낳은 공동체가 이런 교회의 제도화 경향을 문제삼았다고 본다. “그들은 이런 제도화가 예수를 죽이고 자신들을 추방한 유대교의 과오를 답습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도 집단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소마를 자처하는 교회 내부의 중계자 집단을 철저하게 배척합니다. 자신들이 비록 싸륵스의 처지이지만 ‘성령’을 통해 성스런 존재와 직접 대면이 가능한데, 진리의 독점과 권력화를 부를 것이 분명한 성직자 집단의 개입을 요청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죠.” 이런 문제의식은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에서 사도들의 역할을 철저히 주변화하고, 예수를 구원자로 진술할 때면 항상 구체적인 고통의 현장을 먼저 묘사하는 대목 등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요한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교보다 기독교가 더 문제적인데, 뼈저린 배제의 체험을 통해 등장한 후발 신앙집단임에도 유대교보다 더 빠르게 제도화되고 한층 비정상적으로 권력화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기독교가 얻은 것은 폭력성과 배타성이요, 그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곳이 한국이다. “왜 우리 신앙은 선교 현장마다 증오와 싸움과 주검을 낳는가. 왜 오늘날의 이웃들은 우리 신앙을 문제시하고, 왜 사람들은 속속 교회에서 철수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이야말로 이런 문제의식에 핵심적 전거가 된다고 김진호 목사는 말한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1세기 후반 반로마 항쟁이 처절하게 진압된 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 없어지고, 유대인의 신앙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합니다. 유대인들은 위협받는 집단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율법 체계를 정비하고 ‘증오의 정치’에 기반한 공격적인 유대교 재건 프로젝트를 가동하는데, 이때 ‘내부의 적’으로 지목돼 억압받고 추방된 자들이 유대교의 소수파로 남아 있던 예수 추종자들입니다.” 추방당한 예수공동체들은 생존을 위해 공동체 간 결속을 강화하고 스스로를 제도화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이들이 제도화의 전범으로 차용한 것이 유대교 공동체의 회당 모델이었고, 공동체 간 연대를 위해 채택한 것이 ‘열두 사도’ 담론이었다. 김 목사는 <요한복음>을 낳은 공동체가 이런 교회의 제도화 경향을 문제삼았다고 본다. “그들은 이런 제도화가 예수를 죽이고 자신들을 추방한 유대교의 과오를 답습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도 집단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소마를 자처하는 교회 내부의 중계자 집단을 철저하게 배척합니다. 자신들이 비록 싸륵스의 처지이지만 ‘성령’을 통해 성스런 존재와 직접 대면이 가능한데, 진리의 독점과 권력화를 부를 것이 분명한 성직자 집단의 개입을 요청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죠.” 이런 문제의식은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에서 사도들의 역할을 철저히 주변화하고, 예수를 구원자로 진술할 때면 항상 구체적인 고통의 현장을 먼저 묘사하는 대목 등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요한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교보다 기독교가 더 문제적인데, 뼈저린 배제의 체험을 통해 등장한 후발 신앙집단임에도 유대교보다 더 빠르게 제도화되고 한층 비정상적으로 권력화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기독교가 얻은 것은 폭력성과 배타성이요, 그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곳이 한국이다. “왜 우리 신앙은 선교 현장마다 증오와 싸움과 주검을 낳는가. 왜 오늘날의 이웃들은 우리 신앙을 문제시하고, 왜 사람들은 속속 교회에서 철수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이야말로 이런 문제의식에 핵심적 전거가 된다고 김진호 목사는 말한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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