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천손족의 상상도. 천손족은 형벌을 관장하고 농경을 하는 등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현 기자
[한민족의 시원, 만주] <제2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2)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닌 역사 유물 쏟아져
북한 고립-남한 상실,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법륜 스님 등 다섯 분의 특강을 11차례로 나누어 영상과 함께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역사특강 1부 보러가기
우리 민족 상고사를 위부터 다시 정리하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고조선이다. 구전되어 오던 상고사를 기록한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의 한나라는 약 3,300년간 지속됐다.
그럼 이 시대의 왕은 몇 명이나 됐을까? 이 기간이면 최소 70~80명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이름은 7명밖에 없다. 7명이 통치한 나라의 역사가 3,300년이나 되니까 1명당 약 500년씩 통치한 셈인데 그러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 수많은 통치자 중에 워낙 오래된 얘기라 현재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7명밖에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
환인의 한나라가 어디쯤 있었겠느냐? (어디에서 왔을까?)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설은 여러 가지다. 바이칼 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환인 시대에 이어 환웅이 세운 배달 나라는 현재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유물과 결합시켜 보면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보인다.
환웅세력 이동 추정도. 바이칼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그래서 요즘은 멀리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고, 바로 가까이(발해만 연안지역 인근)에서 기원했을 것이란 설도 제기된다. 그 당시에 수만 리를 이동해 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환인의 한나라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추정하기 어렵다. 그냥 옛날 기록으로만 말한다면 하늘나라, 신의 나라로만 인식되었다.
▶환인 시대, 민족의 근원이지만 시작은 아니다
환웅 무리가 이동해 온 경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환웅은 “천손이다.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수준도 토착민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고, 옷도 잘 입으니까 원주민들은 저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후예들이라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문화사적으로 보면 좀 더 선진 문명을 가진 지역에서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미국 역사와 비교해 설명해 보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로 나라의 역사를 따지면 200년밖에 안 되는 역사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역사까지 따지면 더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과 영국을 같은 나라로 보진 않는다. 뿌리는 같지만, 엄격히 다른 나라다. 영국에 뿌리를 둔 나라는 캐나다, 뉴질랜드도 있다. 그런 것처럼 한 나라에 뿌리를 둔 나라와 민족은 우리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동아시아 인종 분포도. 한나라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따라서 한나라가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라고 말할 순 있지만 우리 민족사의 시작을 한나라부터 잡기는 어렵다. 우리 민족사의 시작은 환웅이 이동해 와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연, 신시를 연 때부터로 잡아야 한다. 이를 개천(開天)이라고 한다.
▶고대 동북아의 중심지, 발해만 연안의 ‘신시’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은 동북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요하강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아래 대릉하가 흐른다. 환웅이 내려와서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시’를 건설했다고 할 만한 지역이다. 신시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에서 신시(新市)라고 할 수도 있고, 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귀신 신’(神)자를 써서 신시라고 할 수도 있다. 신시를 세웠다는 말은 새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보통 선진 부족이 후진 부족에 와서 나라를 세울 때는 주로 정복 국가를 세운다. 토착민을 다 정복해서 노예로 부리고 영토를 뺏어서 나라를 세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도의 문명이 발달한 평화국가였다. 토착민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돕기 위해,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그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국가를 세우면서 ‘선진문명을 가진 부족이 후진문명의 지역에 와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선포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일이다. 나중에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몇 천 년 전 원시적인 문화를 가진 집단들이 그렇게 선포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게 홍익인간 정신이다.
환웅시대 신시 추정도.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래픽 문석진
두 번째, 재세이화(在世理化)다. 쉽게 말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질지어다’라는 성경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하늘이란 것은 선진문명이다. 그 법치, 문명, 도덕을 원시인들이 사는 미개한 나라에 와서 그대로 실현하겠다는 통치철학이다. 이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치란 곧 하늘의 법도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그것 자체로 종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이야기다. 이렇게 신시가 탄생했다.
▶환웅시대, 청동기 문명으로의 전환
이 시대의 문명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웅이 신시를 건설할 때 3,000명의 무리를 끌고 왔다고 했다. 당시 씨족, 부족이 고작 몇 십 명, 몇 백 명 단위였으니 엄청나게 큰 무리다. 이 사람들은 원시 채집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문명을 가졌다. 벌써 형벌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법률, 규칙이 있었다는 것이고, 곡식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농경을 했다는 증거다. 원시부족이 아니고, 초기 국가의 형태를 띤 문명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시대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징표가 있었다. 그게 ‘천부인’(天符印)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이들이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는 신석기 시대로 청동기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초기에 청동기는 제사 지내는 도구였다. 워낙 귀해서 신이 주신 선물이라 제사 지내는데 썼고, 제례를 지내는 제사장의 징표였다. (당시 제정일치 사회였다가 시대가 흘러가며 국왕과 제사장의 기능이 분화되고 제사장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오늘날 무당이 굿을 하면서 방울과 칼을 흔드는 풍습은 당시 제사장이 지녔던 천부인의 징표에서 유래한다.) 청동기를 가졌다는 것은 천손이라는 징표이고 주변보다 월등한 문화를 가졌다는 상징이다.
환웅시대 천손이라는 징표가 천부인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그래픽 이규호
▶상고사 기록에 얽힌 비밀
환웅시대는 1대 환웅천왕으로부터 18대 거불단환웅까지 1,565년이나 지속했다. 18명의 통치자가 있었다는 것인데, 일인당 80년씩 통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딱 18명이라기보다는 남아 있는 이름이 18명이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와 끝은 사람들이 확실히 알고, 중간에 확실히 행적 있는 사람만 기록에 남는 것이다.
먼 훗날에도 우리가 조선시대 27명의 왕을 다 기억할 수 있나? 처음의 이성계와 끝의 고종은 기억할 것이고, 태종, 세종, 영조, 정조 정도만 기억할 것 아닌가. 예컨대 사료가 다 불타고 내가 조선시대 역사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준다고 하면 다 기록을 못 하고, 이성계가 나라 건국한 것 좀 쓰고, 태종 좀 쓰고, 세종 좀 쓰고, 세조 때 쓰고, 중간에 빼먹고, 영조·정조 좀 쓰고, 나머지는 지나간다. 이게 세월이 더 흐르면 태조와 고종만 남는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는 자료가 다 없어진 후니까 환인 시대에는 환인 한 사람, 환웅 시대에는 환웅 한 사람만 쓰고, 단군시대에는 단군 한 사람만 쓰고…. 그럼 환인 아들이 환웅이고, 환웅 아들이 단군이고, 그럼 환인은 3천 년 살아야 하고, 환웅은 천오백 년 살아야 하고, 단군은 2천 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 개의 나라가 3대가 된 거다. 비유하자면 고주몽 아들이 왕건이고 왕건 아들이 이성계라는 식으로 상고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웃음) 그러다 보니 우리의 상고사 기록이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신화 속 이야기로만, 후대 사람들이 지어 낸 과학적 사실이 아닌 허구로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환웅시대의 영웅, 14대 치우천왕
환웅시대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건 14대 자오지 환웅, 치우천왕이다. 이 치우천왕은 청동기를 가지고 제기로만 쓴 게 아니라 무기로 썼다.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고 갑옷을 만들고 전쟁에 나가니까 돌 창 들고 싸우는 사람들과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치우천왕과 싸워서 황제가 백전백패했다고 기록했다. 청동 투구를 썼으니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한다. 싸울 때 불이 나고…. (쇠가 부딪히니까 불이 났다고 봤을 것이다.) 그 당시엔 천하무적이었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소장된 청동 투구와 청동기 무기. 환웅시대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은 앞선 청동기로 중국 황제와 싸워 백전백승했다고 전해진다. 조현 기자
그리고 이때 이런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그래서 우리가 ‘배달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개천 즉 하늘을 처음 열었다는 개천절은 누구에서 유래한 것일까? 개천절, 홍익인간·재세이화를 단군의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군이 아니라 환웅천왕이다.
▶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바뀐 단군시대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여신상.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곰을 섬기는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현 기자
환웅시대에 선진 천왕족들이 결국은 토착민들의 여자, 토착 귀족의 여자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긴 자손들은 아버지는 천왕족인데, 어머니를 보면 천왕족이 아니다. 같은 천왕족도 1등급 2등급이 있는 것이다. 처음엔 천왕족만 왕이 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가 천왕족이고 어머니가 토착민인 자손들도 부족장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후대의 부족장들은 순수 천왕족은 없었다. 또 배달 나라가 부패하면서 주변 부족장 중에 뛰어난 사람이 왕이 되었다. 그 사람이 단군이다. 아버지는 천왕족이지만 어머니는 곰족이라고 했다. 이는 곰을 신으로 섬기는, 여신으로 섬기는 부족의 어머니를 둔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왕위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듯, 단군도 이런 식의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가림토 문자·어아악·조천무… 민족 문화의 원형질이 형성되다
단군왕검은 왕위를 계승하면서 부패한 것을 새롭게 일신했다. 수도를 아사달로 옮기고, 환웅천왕의 신시를 다시 복원하겠다고 말했다. 신시의 옛 법도를 다시 세웠다. 나라 이름도 조선으로 바꾸고, 임금의 칭호를 환웅에서 단군으로 바꿨다. 그렇게 단군의 조선 나라를 세우고, 배달 나라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을 <배달유기>라 한다.
환웅시대에는 문자가 나왔다고 한다. 사슴의 발자국 무늬를 가지고 글자를 만들어 ‘녹도문’이라고 한다. 단군시대에는 녹도문을 더 발전시켜 한글의 원형인 36개의 가림토 문자를 썼다. 이 문자로 배달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지낼 때는 ‘어아악’을 부르고, 춤은 조천무를 추었다. 제례 음악과 제례 춤이 생겼다.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질은 단군시대에 만들어졌다.
▶문명의 쇠락과 상고사의 유실
이런 시대(상고사)의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보다 훨씬 더 앞섰고 앞선 문명을 가졌다. 역사의 법칙이란 중심문명으로 자리 잡은 선진문명이 점점 쇠퇴하고, 변두리에서 영향을 받은 문명이 나중에 번성하는 것이다. 변방은 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중심은 몰락한다.
우리가 중국보다 앞선 상고사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의 문명이 쇠락하면서 그것의 영향을 받은 중국 쪽 문명이 새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게 중국의 한나라다. 한나라가 등장할 땐 이미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문화수준은 우리가 높았지만 문명이 쇠락할 땐 무력이 약해진다. 신흥강국은 경제력과 무력이 강하다. 결국 중국 한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우리와 중국의 문명 수준이 비슷해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다가 최근 1천년 동안은 우리가 거꾸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이란 것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흘러갔다가 도로 흘러오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는 가깝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근까지 천년 이상을 우리가 중국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문명이 중국 문명의 아류처럼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식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주장은 허황된 이야기였는데, 최근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할 유적이 만주 일대에서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환웅, 단군 시대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엄청난 유적과 유물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요하문명이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길게 줄을 서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전시는 우리 민족 상고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요하문명전이다. 최근 요녕성 등 만주일대에서 상고사와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 잇따라 출토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조현 기자
▶중화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의 뿌리는?
우리는 왜 중국에 대해 문화적 열등의식을 가졌을까?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우리의 옛 역사,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역사가 다 없어졌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한이 맺혀 있어서 고구려를 멸족시키려고 했다. 역사책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살랐다. 그래도 발해가 건국되면서 그 사료를 일부 복원했다. 그런데 발해도 이민족에 멸망했다. 특히 발해역사는 깡그리 유실되었다. 우리 스스로도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에서 제외했을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신라의 역사를 계승했다. 그러나 신라 역사에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부여시대 얘기가 없다. 신라는 고구려와 싸웠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 역사도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상고사가 유실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이 들어왔고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기 때문에 전해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옛 역사를 기록으로 많이 남겼다. 그러나 고려도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100년 가까이 싸우면서 굴복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료가 거의 소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자발적으로 사대를 취했다. ‘중국은 역사가 오래된 위대한 국가’라며 스스로 사대를 취했는데, 옛날 고기를 보니까 우리 역사가 더 길고 문명도 더 높았다는 것이 나오므로 이걸 중국이 알면 큰일이라 생각해서 금서가 됐다. 그러면서 우리의 역사도 민족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일본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 금서 목록목록에 있는 도서 등을 싹 뽑아서 갔다. 우리가 역사를 복원하려고 보니 남은 책이라곤 삼국사기와 몇 권의 역사 책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이후를 기록한 것이다. 당연히 고구려 이전의 해모수의 부여와 단군의 조선, 환웅의 배달에 대한 기록은 남은 게 없다.
▶일본강점기 실증주의 사학의 대물림
일본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대학이 생겼는데, 교수들은 다 일본 사람이었다. 그때 역사 공부했던 사람들은 일본 교수들이 서명한 합격 논문을 받아야 했다. 일본 교수들은 역사는 실증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실증주의를 하려고) 우리 역사기록을 뒤지다 보니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고 중국의 기록에만 일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중국 책를 찾아서 그 책에 기록된 우리 역사의 편린을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삼국지’란 것은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의 이야기다. 삼국지 가운데 ‘위지동이전’이라는 것이 있다. 위나라 동쪽 오랑캐에 대한 기록이다. 거기에 기록된 걸 보고, 우리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연구하는 식이다. 중국 책에서 뽑아서 우리 상고사를 정립하다 보니 우리 민족의 역사가 형편없는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역사를 우리가 배우다 보니 우리 마음속에 이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인식하게 되어 민족적 열등의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상고사를 복원해야 한다. 그런데 왜 바뀌기 어려운가? 그 선생의 제자가 선생이 되고 그 제자가 또, 선생이 된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교과서를 쓰는데 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다 그 물줄기에 있다. 이것이 상고사를 다시 정립하는 데 있어 아직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다. 그래서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고, 이 상고사가 정립이 돼야 우리가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중국보다 낫다는 우월주의가 아니라 우리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민족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북한은 고립, 한국은 자기 상실…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역사를 왜곡하자는 게 아니라 바로 잡자는 것이고, 과대하자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걸 되찾자는 것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 새기자는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리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신감이 있고 그래야 일본역사도 중국역사도 다 존중할 수 있다. 우리가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인정해 주기 싫은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정체성이 있어 당당하면 상대방의 역사를 인정해줄 수 있다.
이는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과도 통한다. 세계화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 편향이 있다. 세계화하려다 와해 흡수되는 경우와 자기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다 고립되는 경우다. 지금 보면 북한은 고립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남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 둘 다 문제다. 자기 정체성이 확고할 때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 흡수되지도 고립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폐쇄된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민족사관의 정립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 전환과 생생한 현장 중심의 학습이 병행되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법륜 스님,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