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베스트셀러 읽기 / 〈덕혜옹주〉
권비영 지음/다산북스·1만1800원 기억해 달라는 말, 무섭다.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말, 두렵다. 마음의 기억회로는 나날의 일과와 일상만으로도 빼곡하고. 기억은 몸의 실천이요 망각은 그 휴식이니. 우리는 누군가를 잊어야 새로이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니. ‘이 여인을 기억하라.’ 지난주 광화문 어름을 어슬렁거리던 이들이라면 보았을까. 이번주 강남역 근처를 지나친 이들이라면 쳐다봤을까. 빛바랜 흑백사진 속 단정하게 빗어넘긴 생머리에 완강한 듯 서늘한 이마. 기모노를 입은 열네 살 그 소녀. ‘기억’을 요구하는 그 단호한 명령문 때문이었을까. 광화문 언저리 담벼락에 붙였다가 단속반원들이 떼어내면 다시 붙였던 티저광고 포스터의 앳되고 고운 얼굴 때문이었을까. ‘이 여인을 기억하라’는 문구 외에는 아무 설명 없이 호기심을 자극한 출판사의 기발한 홍보마케팅이 맞아떨어진 걸까. 그 덕이었을까. 덕혜 옹주? 솔직히 지난달 21일 따끈한 새 책 <덕혜옹주>가 장편소설 문패를 달고 나왔을 때 언뜻 웬 ‘복고’인가 했다. 보름이나 지났을까. 이 소설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20위권에 올라섰다. 새해 들어 이달 셋쨋주엔 해를 넘기고도 열풍을 이어가던 <1Q84>를 내려앉혔다. 내리 종합 1위를 달린다. 예스24에도 넷쨋주 종합 4위다. 출간 5주 만에 8만여부가 판매됐다.
소설 <덕혜옹주>는 고종의 막내딸이자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 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그렸다. 몇몇 소설적 허구를 빼고는 상당 부분 기록에 바탕했다 한다. 소설이되 일종의 ‘팩션’이랄까. 덕혜는 1912년 고종과 양귀인 사이에 태어나 창덕궁 낙선재에서 이름도 없이 자랐다. 일곱 살에 아버지 고종의 죽음을 겪었으며, 열세 살에 일본에 볼모로 보내져 그곳에서 37년을 살았다. 열아홉에 일본 남자와 강제로 혼인했고 ‘불면증’과 ‘조발성치매증’이 그를 덮쳤다. 1945년 조선은 해방을 맞았으나, 왕정 복고를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황족의 귀국을 원치 않았다. 10년째 일본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 옹주는 일본 패망과 함께 이혼당한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소설은 이 과정을 ‘비통’과 ‘슬픔’의 정조로 애절하게 그리고 있다. 때론 순정만화 혹은 무협지적 감정과잉도 느껴진다. 소설의 최고조는 덕혜 옹주가 견뎌야 했던 딸 정혜(마사에)와의 갈등이다. 조선 황녀와 일본 하급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끝내 자신의 반쪽 조국과 어머니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으로 그려진다. 딸에게 조선을 가르치고 딸과 함께 창덕궁 비선재로 돌아오려는 덕혜 옹주의 절망과 고통이 눈가를 뜨겁게 한다. 소설은 황녀라는 존귀한 신분임에도 비참한 삶을 강요당했으며, 그러나 그 위엄을 잃지 않았다는 ‘복고’ 코드를 깔고 있다. 옹주를 구출하려는 몸종 복순의 굳건한 충성심과 함께다. ‘복고’와 ‘순정’, ‘애국’ 코드가 독자들을 파고든 걸까? 더욱이 올해는 조선이 일본에 강제 통합된 경술국치 100주기를 맞는 해 아닌가. <선덕여왕>에 이은 역사 팩션 드라마가 새해에도 인기몰이를 하는 점도 한 이유가 되겠다. 사라져 다시는 오지 않을 그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공명하는지도 모른다. 지방의 한 무명작가가 쓴 소설의 쾌속항진이 계속된다. 허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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