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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현실에 매복된 상상력, 탈주를 감행하다

등록 2010-04-15 20:00수정 2010-04-15 21:15

작가 윤고은(30)
작가 윤고은(30)
윤고은 첫 소설집 ‘1인용 식탁’
빈대퇴치 숙주되기·남의 꿈 꾸기…
도발적이고 다채로운 중단편 탑재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던 장편 <무중력증후군>으로 2008년 제13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가 윤고은(30)이 첫 번째 소설집 <1인용 식탁>(문학과지성사)을 묶어 냈다. 2004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인 <피어싱>을 비롯한 단편 여덟과 중편 <홍도야 울지 마라>가 실렸다.

어느 날 갑자기 밤하늘의 달이 두 개가 되고 이어서 세 개, 네 개로 계속 늘어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던 소설 <무중력증후군>의 작가답게 <1인용 식탁>에서도 윤고은은 톡톡 튀는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다. 표제작은 어쩔 수 없이 혼자 밥을 사 먹어야 하는 이들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혼자서도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해 먹는 요령을 가르쳐 주는 학원을 등장시킨다.

“한 벌의 수저가 올려진 밥상은 권투가 벌어지는 링과 같다. 여자는 그 위에 홀로 서서 날아오는 시선을 맞는다”와 같은 문장은 혼자서 밥을 주문해 먹을 때면 누구나 겪는 경험의 현실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위해 ‘혼자 먹는 법을 알려주는’ 학원이 있다고 설정할 때 소설은 현실의 경계를 뛰어넘어 공상 쪽으로 차원 이동을 감행한다.

신춘문예만 당선했을 뿐으로 집에서는 백수 취급을 받는 젊은 소설가가 식구들의 눈을 피해 백화점 화장실에 딸린 소파에서 글을 쓴다는 <인베이더 그래픽>의 설정 역시 있을 법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가 쓰는 소설 속 주인공인 증권회사의 낙오자 ‘균’이 작가의 눈앞에 실물로서 나타나는 마지막 장면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순식간에 허물어 버린다.

낙오자 균이 하는 일은 전자오락 캐릭터의 타일 모자이크 ‘작품’인 인베이더 그래픽을 찾아 전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다. 그에게 인베이더 그래픽 타일 모자이크는 “그 네모난 타일의 한 귀퉁이를 툭 치면 빙그르르 돌아가면서 다른 세계로 이끄는 그런 문”으로 인식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윤고은 소설의 자궁과도 같은 상상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상상력의 문을 통해, 주문에 따라 남의 꿈을 대신 꾸어 주는 인물(<박현몽 꿈 철학관>), 빈대 퇴치를 위한 거대한 숙주가 되어서 돌아올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는 인물(<달콤한 휴가>), 온갖 종류의 자판기가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는 무인 모텔에 갇힌 채 전락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야생동물이 되어서는 트럭에 치여 죽는 남녀(<로드킬>) 등의 이야기가 빚어져 나온다.


소설집 ‘1인용 식탁’
소설집 ‘1인용 식탁’
“짐 가방 대신 책갈피 하나면 충분한 이 여행은 매일 밤 한 시간씩 이루어진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진짜 국경을 벗어나본 적은 없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아이슬란드>)

진짜 여행이 아니라 책과 인터넷을 통해 여행을 대리 체험하는 이들의 이야기인 <아이슬란드>의 아이슬란드는 <인베이더 그래픽>의 인베이더 그래픽에 해당한다. 현실을 보완하거나 대체할 상상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소설가를 등장시킨 <인베이더 그래픽>뿐만 아니라, 소설가가 등장하지 않는 <아이슬란드> 역시 작가 윤고은의 소설관을 담은 메타소설로 볼 수 있다. 현실과 상상력의 관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대화를 하는 게 현실이라면, 소리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독백하는 게 상상력인 것 같아요. 현실이 안정적일 땐 불온한 일탈을 꿈꾸고, 거꾸로 현실이 팍팍할 때는 안정제를 섭취하듯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상상력인 거죠.”

때로는 위안을 주고 때로는 파국으로 내모는 상상력의 작용을 다룬 앞의 소설들에 비해 단편 <피어싱>과 중편 <홍도야 울지 마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윤고은의 데뷔작인 <피어싱>이 문신을 소재로 한 천운영의 신춘문예 당선작 <바늘>을 연상시키는 강렬하고 도발적인 소재가 인상적인 반면, <홍도야 울지 마라>는 나이에 비해 몸도 마음도 성숙한 열한 살 소녀를 등장시킨 깜찍한 성장소설이다.

상상력을 축으로 삼아 다채로운 소재와 주제를 선보인 첫 소설집을 내놓으면서 윤고은은 “조심하라고, 아직 내뱉지 않은 말들도 매복해 있다고, 지뢰처럼”(‘작가의 말’)이라 경고(?)했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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