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찾은 박형규 목사. 그 뒤 사진은 중앙의 박 목사와 리영희(왼쪽) 교수, 한승헌 변호사. 그리고 그 아래쪽은 함석헌 선생과 박 목사. 창비 제공
민주화 운동 살아있는 역사 박형규
고난과 영광의 행로 추적-발굴-기록
“불의한 시대, 성직자 감옥행은 당연”
고난과 영광의 행로 추적-발굴-기록
“불의한 시대, 성직자 감옥행은 당연”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박형규 회고록〉
신홍범 정리/창비·2만원 “당신들은 걸핏하면 자유니 정의니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고 떠드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가지고 논할 때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냐. 지금은 대공(對共)하는 시대, 북한 공산주의자들하고 싸워 이겨야 하는 시대다. 당신들은 걸핏하면 증거 증거 하는데, 참 순진하다. 수사를 무슨 증거 가지고 하는 줄 아는가. 우리에겐 모든 게 다 허락된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을 여럿 죽였다.” 치안본부로 끌려간 지 약 20일쯤 지난 어느 날, 5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이 소장’이라는 사람이 소름 끼치는 고문도구들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까지 곁들인 뒤 ‘빨갱이’임을 자백하는 게 사는 길이라고 협박했다. 그는 어떤 고문을 하든지 첫 번째 고문에서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 소장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라며 발길질을 해대고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쥐고 흔들었다. “이 새끼, 진짜 빨갱이로구나. 어디 네가 여기서 살아 나가는가 보자!” 곧 군복 입은 다섯 명이 몽둥이를 들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 빨갱이 목사”라고 외치며 살기등등하게 온갖 욕을 해댔다. 발을 구르고 철제책상을 몽둥이로 내려치면서 금방이라도 그를 칠 듯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곧 잠잠해졌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한 사람만 남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뒤 그 사람이 다가오더니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목사님, 존경합니다. 여기 와서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 자세를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마십시오.” 대학 졸업 뒤 시험을 쳐서 경찰에 갓 들어온 그 젊은 수사관의 이름은 공기두. 공씨는 결국 그곳을 나와 대학교수가 된다.
신홍범 두레출판사 대표가 ‘정리’한 박형규 목사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창비)에 나오는 1976년 6월 어느 날의 일이다. 신 대표는 1970~80년대 인권 관련 자료집들을 보고 “당시의 역사적인 주요 사건치고 박형규 목사님이 참여하고 주도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고 했다.
구구한 수사가 불필요할 한국 민주화운동 대부이자 산증인 박형규 목사. 그는 그 3년 전인 1973년 4월 유신체제를 비판한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징역 2년, 그 다음해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에선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징역 15년, 또 그 다음해인 1975년에는 서울시경이 꾸며낸 ‘선교자금 횡령 및 배임사건’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래도 소용없자 바로 그 다음해에 다시 그를 잡아넣은 당국은 이번엔 그를 아예 ‘기독교에 침투한 빨갱이’로 몰아 제거할 공작을 치밀하게 진행했으나 그것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빨갱이 공작 2년 뒤,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주 시위사건으로 또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박 목사는 1979년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났다. 그 3개월쯤 뒤 궁정동 안가에서 ‘10·26’ 참극이 벌어졌다. 무너진 것은 그가 아니라 끈질기게 그를 제거하려 했던 유신체제였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빨갱이 공작사건 10년 뒤인 1986년 8월14일 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서진회관에서 생선회칼을 휘두른 폭력배들 패싸움에서 4명이 숨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가장 놀란 것은 서울 제일교회 신자들이었다. 그 3년 전인 1983년 10월부터 박 목사와 그를 따르던 신자들을 두들겨 패고 결국 저 유명한 ‘길거리 예배’를 창안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박 목사 반대파 신도 홍아무개는 서진회관 사건을 일으킨 조폭 ‘정진석파’의 별동대장이었다. 그의 지휘자는 국군보안사령부 정보처장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난다.
“유신체제 아래서 나에게 가해진 박해는 주로 민주화운동을 문제삼아 감옥에 가두는 교회 밖에서의 시련이었다면, 전두환 정권의 박해는 나를 교회에서 몰아내기 위해 신자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 교회 내에서의 시련이었다.” 뒤에 숨은 보안사는 민주화운동 ‘투사’들의 산실이자 저항의 거점이었던 제일교회 신자들 가운데 이북 출신의 보수적인 월남자, 특히 그들 중에서도 자녀가 공무원이거나 공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골라 내분을 일으키도록 사주하고 폭력배들을 동원했다. 하지만 제일교회 노상예배 절대다수파는 “패배감, 좌절감이 기쁨으로 변하고”, “모욕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는” 특별하고 신비로운 그 체험을 통해 유럽인들을 비롯한 세계가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로 칭송한 교회를 만들었다. 박 목사가 70살 정년을 1년 앞두고 목회활동에서 은퇴한 1992년까지 제일교회와 박형규 담임목사가 걸었던 고난과 영광의 길은 세계가 지켜보고 후원했던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를 압축적으로 체현한 또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불의한 시대에 “성직자가 감옥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박 목사의 육성과 신 대표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발굴·조사한 자료들이 긴밀하게 짜인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는 한때 한국 기독교회가 ‘예언자적 종교’로 시대를 이끌었던 시절의 한국 사회 핵심 과제와 고뇌, 선구자들의 분투를 명료하게 재현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적인 구원과 사회적 구원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는 사람의 영혼이 가난과 억눌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이웃들을 못 본 체하면서, 사회적 불의를 모른 척하면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의 권력은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과 교회를 박해했다.
유약했고 병치레도 잦았던, “매사에 약간 소극적이고 남의 말을 잘 듣고 따르던” 그가 어떻게 한글을 몰래 가르치다 일제 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는 청년으로 자라고, 히틀러에 저항한 독일 고백교회의 본회퍼와 니묄러, 바르트, 시몬 베유의 사상에 공감하고, “목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강단에 서야 한다”고 했던 장공 김재준 목사의 뜻을 받들며 여든일곱에 이른 지금까지 한길을 걸어왔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쩌면 한가롭게 들렸을 법한 이 질문이 “민주주의와 인권이 날로 후퇴하여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오늘의 위태로운 현실”(신홍범 대표)에서 오히려 더 절실해지고 있다. 30년도 더 전에 박 목사에게 “대공(對共)하는 시대”라며 협박하던 세력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듯한 시절에.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기획·정리한 신홍범 대표 “소수의 의로운 싸움이 어떤 변화 일궜는지 알고팠다”
“수많은 국민들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피 흘려 싸워 얻어낸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불과 2년여 만에 큰 타격을 입고 옛날로 돌아가고 있다. 언론을 장악하려는 현 정권의 행태는 점점 더 노골적이어서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연상시킨다. 참으로 우려스럽다.”
2001년에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를 기획하고 9년의 각고 끝에 이를 세상에 내놓은 신홍범(69) 두레 대표는 그 자신 한국 민주화 역사 한가운데를 가파르게 헤쳐왔다. 1965년 <조선일보>에 입사했으나 동아·조선 두 신문사 기자들이 주도한 언론자유운동에 가담했다가 1974년 12월 해직당했다. 그는 박정희 유신독재 상징어 가운데 하나가 된 ‘보도지침’의 존재를 1986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폭로했을 때 그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반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언론의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라는 신조를 지닌 그가 이명박 정권 이후의 퇴행적 변화를 걱정했다.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간 박 목사의 특별한 삶을 알아보고 그 생애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해 기획했다. 유신체제를 비롯한 군사독재를 어떻게 보았기에 그렇게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그런 신념과 신앙을 가지고 권력과 맞섰을 때 권력이 어떻게 박해했으며, 힘없는 개인이 어떻게 이를 견뎌냈는지, 그리하여 모든 것을 건 소수의 외롭고 의로운 싸움이 우리의 현실과 역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박 목사가 제일교회 담임목사 시절을 마감한 1992년까지의 민주화운동 쪽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원래 자서전으로 기획됐으나, “그럴 인물도 못되고 그럴 능력도 없다”며 고사하는 박 목사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후대가 참고로 삼으면 좋을 민주화운동 관련 회고록”으로 낙착됐다. 신 대표는 오랜 지기이자 동지인 원로언론인 임재경씨와 함께 2년여에 걸쳐 매회 2~3시간 정도씩 30회 이상 박 목사를 만나 질문하고 답하는 식으로 박 목사의 기억을 채록했다. 작업 도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합세해 녹음을 풀어쓰는 작업을 맡았다.
문답식 인터뷰 형태를 예정했다가 채록 과정에서 수십년의 연대를 오가는 화자의 연상작용으로 인한 서술상의 기술적 어려움, 그리고 당시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설명 없이 박 목사의 생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등으로 지금의 형태로 바꿨다. 신 대표는 그 결과 “대담 형식이 주는 직접성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전달해주는 형태가 돼버린 게 아닌가, 박 목사의 육성이 사라져버려 이야기의 신뢰성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책이 나온 뒤 박 목사는 만족감을 표시했다. 박 목사는 특히 당시 한국 사회에 대한 국내외의 많은 기록들을 찾고 꼼꼼하게 정리해 채록 내용을 짜임새 있게 보완한 신 대표가 “실은 책을 다 썼다”며 그 공을 치하했다.
“(박 목사의 삶에서) 겨우 나무기둥과 중요한 큰 가지 몇 개를 어설프게 그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겸손해한 신 대표가 박 목사한테서 받은 깊은 인상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으로 꼽은 것도 “겸손과 부드러움 속의 카리스마,” “대세 순응주의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뛰어난 기억력이었다.
<한겨레> 논설주간을 지낸 신 대표는 1983년부터 두레출판사를 맡아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이태의 <남부군>, 리영희의 <역설의 변증>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0억인의 나라>, 김지하의 <남녘땅의 뱃노래> 등을 펴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신홍범 정리/창비·2만원 “당신들은 걸핏하면 자유니 정의니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고 떠드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가지고 논할 때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냐. 지금은 대공(對共)하는 시대, 북한 공산주의자들하고 싸워 이겨야 하는 시대다. 당신들은 걸핏하면 증거 증거 하는데, 참 순진하다. 수사를 무슨 증거 가지고 하는 줄 아는가. 우리에겐 모든 게 다 허락된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을 여럿 죽였다.” 치안본부로 끌려간 지 약 20일쯤 지난 어느 날, 5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이 소장’이라는 사람이 소름 끼치는 고문도구들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까지 곁들인 뒤 ‘빨갱이’임을 자백하는 게 사는 길이라고 협박했다. 그는 어떤 고문을 하든지 첫 번째 고문에서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 소장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라며 발길질을 해대고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쥐고 흔들었다. “이 새끼, 진짜 빨갱이로구나. 어디 네가 여기서 살아 나가는가 보자!” 곧 군복 입은 다섯 명이 몽둥이를 들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 빨갱이 목사”라고 외치며 살기등등하게 온갖 욕을 해댔다. 발을 구르고 철제책상을 몽둥이로 내려치면서 금방이라도 그를 칠 듯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곧 잠잠해졌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한 사람만 남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뒤 그 사람이 다가오더니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목사님, 존경합니다. 여기 와서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 자세를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마십시오.” 대학 졸업 뒤 시험을 쳐서 경찰에 갓 들어온 그 젊은 수사관의 이름은 공기두. 공씨는 결국 그곳을 나와 대학교수가 된다.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박형규 회고록〉
기획·정리한 신홍범 대표 “소수의 의로운 싸움이 어떤 변화 일궜는지 알고팠다”
신홍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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