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소멸의 자연학>
박성관 지음/그린비·3만2000원
<종의 기원>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종의 기원>을 읽어본 사람도 거의 없다. 심지어 그 분야 전문연구자들조차도. 지난해는 찰스 다윈(1809~1882·사진) 탄생 200돌이었고, 그가 50살에 써낸 <종의 기원> 출간 150돌이어서 그에 대한 재평가, 칭송과 함께 숱한 관련서적들이 출판됐지만 아마도 그런 추세를 바꿔놓지 못했을 것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10여년간 이 고전을 읽고 강의해온 박성관(43)씨의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소멸의 자연학>의 큰 장점은 우선 읽히는 책으로 다시 썼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발췌·요약본이나 쉽게 풀어쓴 안내서류는 아니다. 원전 내용을 3분의 1 이상 충실히 번역해서 옮기고, 원전의 여러 판본과 다윈의 다른 저서들, 국내외의 다양한 번역서들과 비교하면서,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도킨스, 기타무라 유이치 등 많은 연구자들을 불러내 의미를 되새기고 어떻게 읽어야 할지 꼼꼼하게 조언한 책은 ‘현대화’되고 더욱 풍성해졌다.
9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이 단순한 해설서 이상인 것은 10여년간 10번 이상 이 책을 읽고 세미나와 강의를 통해 쌓아올린 박씨의 남다른 내공, 그리고 강렬한 현실비판적 문제의식이다.
사람들은 “창조론을 비판하며 진화론을 확립한 과학역사상 최고의 고전, 서구를 비롯하여 전세계를 뒤바꾼 혁명의 서” 등의 찬사를 받는 <종의 기원>을 왜 읽지 않을까. 박씨의 생각으로는, 학교 다닐 때 다들 배운 적 있는 진화론을 사람들은 얼추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막상 읽어보려 하면 150년이나 묵은 이 두꺼운 “고물탱이” 만연체 책을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것, 극소수가 의무감에서라도 가까스로 다 읽어냈다 한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도 없다는 것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번역본이 있다 해도 도전해보기가 망설여지는 터에 좋은 번역본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소멸의 자연학>은 바로 그런 난제들을 해소하고, 현대 진화론의 성과들을 토대로 <종의 기원>을 재해석해 보려는 독특하고 야심만만한 책이다. 지은이의 문제의식은 부제격인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소멸의 자연학’에 응축돼 있다. <종의 기원> 초판본 제목은 <자연선택, 또는 생존투쟁에서 유리한 품종의 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였다. 박씨가 새로 붙인 부제는 박씨의 창작이 아니라 <종의 기원> 본래의 문제의식을 되살려낸 것이다. 그중의 ‘인간소멸’이 암시하는 것은 150년 전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창조론, 절대자 신이 이 세상과 생명들을 창조하고 인간을 그 주인으로 세운 인간중심주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이다. 그런데 다윈이 비판하고 부정한 것은 창조론만이 아니다. 그는 라마르크로 대표되는 당대 진화론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바로 이 점이 지은이의 문제의식과 직결된다. 당시 진화론자들은 천지창조와 생명현상을 창조주의 섭리로 설명해온 창조론자들과는 달리 태초에 물질이 있었고 그것이 진보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생명을 낳고 진화해왔다는 주장을 폈다.
다윈은 섭리도 법칙도 부정했다. 그는 법칙을 내세운 당시 진화론은 지향점이 예정돼 있는 목적론적 세계관, 인간중심주의로의 발전사관으로 이어져 결국 창조론과 다를 바 없는 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실제 당시 진화론을 편 과학자(박물학자)들 중엔 기독교 성직자들이 많았다. 다윈은 진화의 세계는 방향도 지향점도 없으며, 오직 모든 생명체들이 ‘개체의 차이와 변이’에 따라 무제한 다양하게 끝없이 진화해가는 ‘무상과 장엄’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자연법칙이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은 자연계의 다양한 현상들의 반영물일 뿐이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한날에 태어난 그가 1831년 22살 때 군함 비글을 타고 5년간 세계를 떠돌며 목격하고 조사하고 수집한 방대한 자료들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종의 기원>은 20여년간 그것을 분류하고 정리해낸 깊은 사색의 결과물이다.
그는 개체들이 무한번식을 거듭하면서 차이, 변이, 기형, 변종을 거쳐 어버이 종(원형)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것들이 가장 번성하고 마침내 종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종을 창출하는 것, 기존 질서와 계통의 한계를 돌파해버리는 일탈과 무한변화야말로 진화의 힘, 창조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엔 하등과 고등의 구분이 없고 모든 생명체는 각자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들 각자의 진화의 끝은 기존 종의 소멸과 새로운 종의 탄생과 번성이며, 진화는 그 무한과정이다. ‘인간소멸’은 바로 기존 종의 소멸과 새로운 종의 출현, 그들이 새로 펼칠 새로운 차원의 무상과 장엄의 세계를 암시한다. 그것이야말로 다윈이 19세기에 비춰준 “홀연한 빛”이었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은 미처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시들고,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세상의 비밀은 거룩한 기원에 있지 않다는 그의 메시지는 유폐됐다. 부르주아들이 주조해낸 근대인들은 지난 150년간 다윈의 과학비판을 종교비판으로 좁히고, 자연선택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으로 변형시켰으며, 생존투쟁과 상호의존은 생존경쟁으로 바꿔쳐버렸다. 그리하여 다윈은 종교비판가이자 부르주아 가치의 대변자로 전락했다. 당대의 기성 세계와 앎의 체계에 도전했던 다윈의 의문과 그 불온성은 거세당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과 지금의 개발·성장주의의 맥이 거기에 닿아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기존의 모든 앎의 체계에 의문을 품어온 지은이가 <종의 기원>에서 발견해낸 것이 바로 다윈의 의문과 불온성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을 가리키는 풍요로운 빛살이었다. 나는 이제 여러분과 함께 <종의 기원>을 새로 읽음으로써 그것을 소생시키고 싶다.” 10여년 벼려온 그의 다윈 공부 깊이와 폭이 예사롭지 않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모든 존재는 고유하며 특별한 것”
■ 지은이와 함께 / ‘종의 기원’ 다시 쓴 박성관씨
군대에 갔다 온 뒤 전자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박성관씨는 직장생활 3년 만에 시들해져, “책 읽으며 자유롭고 재미나게 살기로” 작심하고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찾아갔다. 그때가 10여년 전인데, 혼자 공부하던 일본어를 배우려고 갔는데, 막상 가서 보니 자신이 오히려 선생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고 했다. 그 무렵 우연히 <종의 기원>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근대를 넘어서는 탈근대성, 반근대성 쪽에 주목하다가 3, 4년 전부터는 인간 자체를 넘어서는 쪽으로 관심이 이동했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온 그는 “제도종교에 가입해 있진 않다”고 했다. “요즘 갈릴레이에 빠져들고 있고, 당분간 수학과 물리의 세계에서 노닐 것 같다.” 근대의 종교는 과학과 대척점에 있지만, 흔히들 사실의 세계라고 하는 자연과학에서 그는 초월적 요소를 발견했단다. “일상의 사실 자체가 내게는 초월적이며 멋진 것이다. 물질을 죽어 있는 걸로 간주하고 그 위에 생물, 그리고 또 그 위에 인간을 두는 것은 인간중심주의다. 자연과학이나 수학은 인간소멸의 세계, 인간 초월의 세계를 담고 있다.”
“아주 가난하다”는 그가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애 키우는 일이라며 “애 낳고 키우니까 오히려 생활비가 줄더라”고 했다. 아이를 낳을 때 산파 할머니한테 갔다. 병원 가는 것도, 검사받는 것도, 분유 먹이는 것도 모두 반대다.
“자본주의적 출생은 병원서부터 시작된다. 병원에 가는 순간 분유부터 기저귀까지 몽땅 거기서 주는 대로 써야 하고 그래서 절약해야 하는데, 그래도 없으면 부르주아한테서 빼앗아 오는 수밖에 없지 않나. 그것 좋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고. 육아를 하다보니 친구에게 전화도 하고 이웃을 방문하기도 하고 또 만나서 상담도 하게 되고 돈도 안 쓰게 된다. 부르주아들 누리는 것이 우리한테서 빼앗아 간 것이긴 하나 그걸 도로 찾아오겠다고 하는 게 옳을까.” 그보다는 병원·학교 등 지금의 부르주아 질서가 만든 것들을 더 근사한 것으로 바꿔가는 다른 삶을 추구하는 게 더 낫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자신이 이건희씨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대학도 부정하진 않지만 대학 바깥도 좀 어렵지만 좋은 점이 더 많다. 다양한 레벨의 공부를 대학에선 할 수 없지 않은가. 대학 바깥에 있으니까 내 맘대로 이런 저런 책도 읽을 수 있고, <종의 기원>도 그래서 만날 수 있었다. 대학 개조에 목숨 걸 것 없다. 그래봤자 대중의 호응도 없고. 그보다는 아예 다른 길을 가면서 대학도 여러 선택 가능한 것들 중의 하나로 만들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다양해져야 한다. 열두 번 더 다양해져야 즐겁고 여유롭게, 풍요롭고 다양하게 살 수 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도 획일화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다 다르고 고유하며 특별한 것이다.” 거기엔 무생물까지 포함된다.
세계는 그 특별한 존재들이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호의존 관계 위에 서 있다는 것, 이를 자각한 새롭고 더 풍부한 삶을 위한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종의 기원>에는 그런, 우리에게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이 들어 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사진 신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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