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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근대화의 바벨탑 ‘굴곡진 여정’의 기록

등록 2010-07-02 21:17

〈강남몽〉
〈강남몽〉
‘친일’ 기업가·부동산업자·깡패…
욕망에 얼룩진 불온한 군상들
황석영 작가 370쪽에 밀어넣어
〈강남몽〉
황석영 지음/창비·1만2000원

황석영(67)의 소설 <강남몽>은 1995년 6월, 삼풍백화점을 연상시키는 대성백화점의 붕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백화점 회장인 김진의 후처 박선녀가 그곳에 갔다가 붕괴 사고를 당해 시멘트 아래에 깔리게 된다. 그로부터 소설의 제1장은 서울 근교 국밥집 딸이었던 선녀가 모델 생활을 거쳐 화류계에 입문하고 룸살롱과 나이트클럽 등을 운영하며 폭력배들과 인연을 맺는 한편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늘리다가 김 회장을 만나 그의 후처로 들어앉게 되기까지의 반생을 속도감 있게 그린다.

선녀의 이야기로 문을 연 소설의 제2장은 김 회장의 생애에 할애된다. 어려서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김진은 일본 헌병대의 밀정으로 일하다가 일본 패망 뒤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청 산하 특무기관의 요원이 된다. 일본 헌병대에 몸담았던 자들 상당수가 미군정청 특무기관에 고스란히 옮겨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해방 공간에서 좌익을 탄압하고 4·3 사태와 여순 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하며 박정희 좌익 혐의 사건을 조사하는 등 굵직한 사회·정치적 사건들의 배후에서 암약하다가, 5·16 쿠데타 이후에는 건설업을 시작해 큰돈을 벌고 내처 미군에게 불하받은 서초동 땅에 아파트와 백화점을 올리면서 꿈의 결실을 보게 된다.

소설은 이런 식으로 부동산업자 심남수(3장), 주먹패 홍양태와 강은촌(4장), 그리고 백화점 종업원 임정아(5장)를 각 장의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욕망의 행로로 하여금 우리 사회 압축 근대화의 굴곡진 여정을 기록하도록 한다. 예컨대 친일에서 친미, 친독재로 발을 옮겨 디디며 실리와 특권을 추구해 온 김진의 행보를 통해 우리 사회 주류의 해바라기적 속성을 그리고, 임정아의 부모 임판수와 김점순의 신산한 삶의 내력을 좇는 가운데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전모가 되새겨지는 식이다.

한 사람의 생애 전체 길이에 해당하는 시간대를, 서로 다른 대여섯 명 등장인물들의 삶을 프리즘 삼아 제대로 그리자면 웬만한 대하소설 분량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강남몽>을 읽다 보면 다른 여러 소설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령 김진의 만주 시절 이야기는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아리랑> 같은 소설들을, 여순 사건 대목은 역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광주대단지 사건은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박선녀의 화류계 생활을 다룬 부분은 이문열의 <변경>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작가는 “대하소설의 시대는 갔다”는 판단에서 370쪽 남짓한 단행본 한 권에 그 모든 이야기를 욱여넣었다.


황석영(67)
황석영(67)
<강남몽>에는 김구, 여운형, 박정희, 김재규 같은 실명도 나오지만,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본명을 약간씩 비틀어 쓴 허구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을 연상시키는 김진을 비롯해 특무대장 김창수(실제 이름 김창룡), 깡패 홍양태·강은촌(조양은·김태촌), 80년대 사채시장의 큰손 이희철·장영숙(이철희·장영자) 등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들이 실물대로 등장해 실감을 더한다. 작가는 “소설에 그려진 것의 80%는 사실 그대로이며, 인물들의 일상 생활을 형상화한 20% 정도가 허구”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를 마련한 작가는 “나는 정치적 판단을 드러내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렸는데도 소설은 매우 불온한 꼴이 되었다”며 “사실은 그만큼 힘이 세다”고도 했다.

각자의 장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면서 현대사의 여러 국면들을 감당했던 인물들은 생의 경로에서 서로 만나고 엇갈리기도 하다가는 95년 6월의 백화점 붕괴 사건을 통해 한 점으로 수렴된다. 박선녀와 임정아가 무너진 시멘트 더미에 깔려 나란히 구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는가 하면, 김진은 제가 일군 꿈의 바벨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보며, 심남수는 자신의 건축사무소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접하고, 홍양태는 백화점 붕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주 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한다.

“한국 자본주의 근대화의 그늘과 상처를 들여다보고자 했습니다. 현재 우리 삶의 뿌리가 어디인가, 그 욕망과 좌절을 이쯤에서 다 같이 되돌아보자는 생각에서 이 소설을 썼어요.” 작가는 “근대화를 이룬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여공과 월급쟁이 회사원들”이라며 “지금 우리 사회의 중추인 넥타이 부대들이 이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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