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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몸은 자라는데 세상을 다 살아버렸다

등록 2010-07-16 21:43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부모의 집에서 도망나온 소녀가
‘진짜 엄마’ 찾아 떠도는 이야기
최진영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지음/한겨레출판·1만1000원

언나이기도 하고 간나이기도 하며 이년이나 저년 또는 거지새끼이기도 하다. 꼬마나 유나인가 하면 또한 장미이거나 드드덕이기도 하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최진영(29)의 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서 주인공 소녀는 이런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어느 것도 소녀의 진짜 이름은 아니다. 소녀의 진짜 이름은 그 여러 가짜들 위를 속절없이 미끄러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문제 될 건 없다. 소녀는 “이름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남들이 나를 부르는 게 싫다”고 하지 않겠는가.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그 소녀>)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한테서 도망쳐 나온 소녀가 ‘진짜엄마’를 찾기 위해 떠도는 이야기다. 장미언니, 태백식당 할머니,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 유미와 나리 등 다섯개의 부 이름은 떠돌이 소녀가 차례로 몸을 의탁했던 이들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그 소녀>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취한다.

‘진짜’ 엄마를 찾아 떠도는 주인공 소녀는 루카치가 말하는바 ‘내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떠난다’는 근대 소설의 주인공에 관한 정의에 부합한다. 그렇지만 소녀의 여행은 진짜엄마를 찾는다는 목적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 및 사람들과 부딪치고 그들을 관찰하는 데에 그칠 따름이다. 그렇기는 해도 소녀의 여행이 실패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소녀가 찾는 진짜엄마는 실체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가치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일단 평화라고 해 두자.

“엄마 안에서 살던 천 년의 세월 동안 내 이름은 평화였다. 엄마가 평화야, 라고 부르면 바다가 출렁이고 하늘이 춤을 췄다.”

엄마의 애정 어린 부름에 온 우주가 호응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소녀에게 출생은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락’(Fall)과 다름없다. “엄마의 구멍을 찢고 바깥으로 나왔던 그때 그 순간, 나는 이미 끝을 경험했”다는 진술을 보라. 에덴동산의 평화로부터 추방된 소녀가 집을 떠나 방황길에 오르는 것은 재생 또는 구원(Redemption)을 향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최진영(29)
최진영(29)

그렇다고 해서 <그 소녀>를 지나치게 기독교적 타락과 구원의 서사에 얽어맬 까닭은 없다. 방황의 어느 한때 소녀는 교회와 독실한 청년 신자인 ‘목소리’의 신세를 지기도 하지만 교회에 대한 소녀의 태도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그곳에서는 늘 착한 생각에 착한 말만 해야 할 것 같고, 목소리는 항상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했으니까.”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녀가 규범과 위선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으며 일탈과 모험에 더 친연성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도 소녀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악한(惡漢) 주인공을 닮았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형식적 특징인 병렬적 구성이 이 소설에서는 뚜렷하다. 그렇지만 각설이패의 트럭 위에서 초경을 겪고 폭주족 남자친구와 함께 든 여관방에서 복숭아 크기로 솟아난 가슴을 확인하는 데에서 보듯 소설 속에서 소녀는 나름대로 성장한다. “많은 것에 익숙해지는 동안, 나는 키도 조금 자라고 머리카락도 많이 길고 그리고, 무언지 모를 어떤 것도 불쑥 자랐다.” 그 성장이 단지 신체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정신적 성숙 역시 수반한다는 사실은 소녀의 다음과 같은 관찰에서 알 수 있다.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변할 뿐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틀과 원리는 어디든 비슷해서, 맞는 사람은 늘 맞고 으스대는 사람은 늘 으스대며 때리는 자는 늘 때리는 자다.”

단순하다면 지극히 단순할 수도 있는 이런 깨달음은 그러나 소녀가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쳐 얻은 것이라는 점에서 무겁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성장은 역시 불완전하고 뒤틀려 있다. “난, 어린애에서 바로 노인이 된 것만 같”다는 진술에서 보듯 소녀 안에는 신생아에서부터 파파 할머니까지가 다 들어 있다. 남자친구의 아이를 수태한 소녀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면서 자신도 죽어 가는 결말은 그런 뒤틀린 성장의 한 귀결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결말 장면에는 소녀가 집을 나와야 했던 ‘진짜’ 이유가 숨어 있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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