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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상·현실 뒤섞인 ‘5차원 세상’의 초대

등록 2010-10-01 23:09

작가 최제훈(37)
작가 최제훈(37)
신예작가 최제훈 첫 창작집
실험적·도발적인 내용 ‘눈길’
21세기 소설의 새 활로 제시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문학과지성사·1만1000원

신예 작가 최제훈(37)의 첫 창작집 <퀴르발 남작의 성>은 과감한 실험정신과 도발적 문제제기로 무장한 야무진 출사표다. 이 책에 실린 여덟 단편 중에는 시체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든 인조 인간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도 있거니와, 최제훈 역시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해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축조하는 데에 특장점을 보인다.

200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이자 표제작인 <퀴르발 남작의 성>부터 보자. 이 소설은 드라큘라를 닮은 식인 귀족 퀴르발 남작에 얽힌 17세기 말의 이야기에서부터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어느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퀴르발 남작 이야기, 그 이야기를 담은 1930년대 미국 소설과 1950년대 영화, 1990년대 한국의 한 대학 교양과목 ‘영화 속의 여성들’ 강의 장면, 2004년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일본 감독 인터뷰, 2006년 인터넷 포털에 오른 영화 에세이 등 열두 개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나열함으로써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변형되어 전파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어지는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은 소설 속 명탐정 셜록 홈스가 자신의 동료인 왓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한다. 더 기발한 것은 홈스가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 아서 코넌 도일의 의문사 사건을 수사한다는 설정이다. 문과 창문이 모두 안쪽에서 잠긴 방 안에서 날카로운 흉기에 찔려 죽은 상태로 발견된 코넌 도일. 방 안 어디에서도 흉기는 발견되지 않는데…. 결국 사건은 독자들 사이에서 홈스의 명성이 높아갈수록 자신의 정체성과 지위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 도일이 홈스를 겨냥해 꾸며낸 자작극인 것으로 밝혀진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소재로 삼은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휘뚜루마뚜루 세계사 1>과 메리 셸리의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재해석한 <괴물을 위한 변명>에서도 작가의 전복적 상상력과 문화공학적 소설 작법은 여전하다. 마녀 세계의 잡지에 실린 논문 형식을 빌린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은 15~18세기 유럽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마녀사냥을 “마녀사의 전환점”으로 파악하고 마녀들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마녀사냥은 진짜 마녀가 아니라 ‘마녀라는 환상’을 대상으로 한 소동이었다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


〈퀴르발 남작의 성〉
〈퀴르발 남작의 성〉
<괴물을 위한 변명>에서도 작가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인 메리 셸리, 괴물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북극 탐험선 선장,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동생 에르네스트 등을 등장시켜 우리가 아는 프랑켄슈타인과는 다른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신이 부여한 성 정체성과는 다른 정체성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끝에 자신의 역할을 대행할 존재로서 또 하나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


함께 수록된 <그녀의 매듭> <그림자 박제>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는 앞서 소개한 네 편과는 다른 유형의 소설들이지만 그 역시 최제훈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들에서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것은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로서의 존재라 할 법하다. 다중인격, 기억상실, 아바타 놀이 등을 소재로 삼은 이 소설들에서도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본체와 가상을 뒤섞는 작가의 창작 방식은 여전하다. 소설집 맨 뒤에 실린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나와 한바탕 난장을 펼치는 에필로그이자 독특한 방식의 ‘작가 후기’로 읽힌다.

최제훈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문예창작학과로 진학한 ‘늦깎이’ 작가다. 그의 첫 책은 안정적이고 세련된 문장, 풍부한 인문 지식, 그리고 절묘한 구성의 묘로 읽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독자는 무엇보다 그의 소설들에서 21세기 소설의 새로운 활로를 짐작하게 된다. 소설의 죽음이니 문학의 종언이니 하는 부음들이 어지럽게 날아든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모든 이야기가 다 말해진 시대에도 새로운 이야기는 다시 가능하다는 것을 최제훈의 소설집은 보여준다. 고갈의 시대 소설의 생존법이라 할 만한 그의 소설 공학은 동료 작가들과 문학 지망생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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