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4일 일본 국가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의 정문쪽 모습. 참배객들이 사찰의 일주문격인 거대한 ‘도리이’를 지나 신사 본전으로 향하고 있다.
도쿄까지 북상한 장마전선이 잠시 주춤한 지난 14일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일왕의 거처 왕궁의 북쪽 기타노마루 공원과 맞닿은 신사는 도심속 숲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어 직장인들이 휴식을 위해서도 자주 오는 곳이다. 신사 입구에 우익차량 · 경찰 야스쿠니는 정문 격인 거대한 ‘제1 도리이’부터 위용을 자랑한다. 일본 최대급으로 높이가 25m나 된다.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일본 근대 육군의 창설자인 오무라 지로의, 일본 최초 서양식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지름 1.5m의 국화 문양을 한 신문 안쪽에 사람들이 참배를 하는 배전, 신으로 모셔진 전몰자들의 넋이 있다는 본전, 이들의 명부인 ‘레이지보’ 봉안전이 차례로 자리잡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쟁박물관 ‘유슈칸’이 있다. “야스쿠니의 신들에 관한 얘기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1882년에 만든 뒤, 2002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청·일,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활약상 등 자료 10만여점이 갖춰져 있다. 태평양전쟁 때 앳된 젊은이가 타고 자살공격을 하던 인간어뢰 ‘가이텐’과 로켓특공기 등의 실물도 전시돼 있다. 학도병 출신 한 해군장교가 가이텐에 오르기 전 남긴 육성 유서는 “원수를 쳐부수라는 지존의 명령이 내려졌다. 남은 생을 결전의 한 순간에 바치자. 승리로 나아가자”고 외치고 있었다. 신사나 박물관 어디에도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참혹함을 다룬 전시물이나 내용은 없었다.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영혼을 받들고 영광스런 전쟁을 기억하게 하는 음울한 국수주의만 떠돌고 있었다. 이날은 아침부터 살풍경이 펼쳐졌다. 신사 입구에는 일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구호가 적힌 우익 선전차량이 진치고 있었다. 경찰도 엄중 경비를 폈다. 야스쿠니에 ‘합사당한’ 대만 원주민 희생자들의 영혼을 데려가는 의식이 예정된 날이었다. 대만 원주민 60명은 전통의식을 치르기 위해 신사를 찾았다. 그러나 우익 행동대원들의 위세와 물리적 충돌 가능성을 빌미로 내세운 경찰의 만류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원된 ‘어깨’임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는 차림새를 한 행동대원 몇십명은 ‘원천봉쇄’에 성공하자 행동대장의 구령에 따라 대오를 갖춰 ‘오야붕’(우두머리)에게 절을 한 뒤 해산했다.
엇갈리는 유족들의 목소리 긴장된 분위기가 사라진 오전 11시께 참배를 마치고 신사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유족들을 만났다. 1944년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곳에 모셔져 있다는 63살, 61살의 자매와 아흔을 넘긴 어머니였다. 이른바 ‘야스쿠니의 딸들과 아내’다. 자식이나 남편, 아버지를 전쟁에서 잃은 이들의 앞에는 늘 ‘야스쿠니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전국 각 지방에 있는 유족회는 1년에 한번씩 단체 참배를 한다. 이들은 가나가와현 한 지역 유족회 소속으로 아침 일찍 130여명이 함께 버스를 타고 왔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참배 문제를 꺼냈다. 언니는 “나라를 위해 희생당했는데 이렇게 받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유족으로서의 당연한 요구를 했다. 그는 침략이 아니라 평화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참배를 한다는 평범한 유족의 마음을 한국인들에게 꼭 전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동생은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총리의 참배에 부정적 인식을 보였다. 그는 “이렇게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참배한다고 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조금 떨어진 벤치에선 다른 65·63살 자매가 총리의 참배를 화제에 올리고 있었다. 전혀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심정을 털어놓았으나 이름을 밝히기는 거부했다. 이쪽에선 동생이 강경했다. 그는 에이(A)급 전범 합사에 대해 “일본에선 나쁜 짓을 하더라도 죽으면 부처님이다. 죽고 나면 죄를 묻지 않는다”는 ‘고이즈미식 화법’을 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끌려간 당신들의 아버지와 전범을 똑같이 다뤄야 하느냐, 전쟁을 주도해 주변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을 숨지게 한 책임은 어떻게 물어야 하느냐는 물음에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전쟁의 참혹함은 흔적도 없다
‘영광스런’ 전쟁만 남았다
“일왕에 충성” 선전차량 진 치고
‘야스쿠니의 아내와 딸’들은
“죽으면 누구나 부처”라며 고개 돌린다
에이급 전범 분사엔 반대가 들끓는다
에이금 전범 분사엔 반대가 들끓는다
야스쿠니는 여전히 침략주의 상징이다 언니는 ‘잘못된 전쟁’으로 “참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다”며 눈시울을 붉히면서 “젊은이들을 세뇌해 전쟁터로 몰아간 사람과 끌려간 사람은 반드시 구분해야 하지만, 60년 이상 지나니 (전범들도) 용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야스쿠니의 ‘해법’을 묻는 물음엔 “무척 어려운 문제”라면서도 “바깥에서 보는 것처럼 유족회가 군국주의 부활에 앞장서거나 하지 않으며, 요즘 평화운동도 많이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100만가구에 이르는 유족회가 우익 주도의 자민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해온 게 문제라고 꼬집은 뒤, 자신의 어머니 세대 이후에선 무조건 지지가 사라지고 있다며 유족회의 달라진 분위기를 소개했다. 이들 자매는 특히 주변국을 자극하는 우익 정치인의 잇따른 망언에 대해 “바보같은 짓”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이들은 지난주 유족회가 비공식 간부회의를 열어 사실상 총리의 참배 자제를 요청한 것도 변화의 주요한 상징이라고 지적했다. 비록 총리 참배 촉구로 공식 의견이 다시 정리됐지만, 유족회 내부의 엇갈린 기류를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욘사마’(배용준씨 애칭) 팬이라는 이들은 야스쿠니 문제로 마찰이 계속돼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범 합사 사실상 정부가 주도 출발점은 메이지유신이다. 왕정복고 세력이 막부군과 결전을 벌여 물리친 ‘보신전쟁’ 이듬해인 1869년 정부군 쪽 희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만든 도쿄초혼사가 전신이다. 메이지 왕이 10년 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야스쿠니(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라는 말로 신사 이름을 바꿨다. 야스쿠니는 내무성이 관리하는 일반 신사와는 애초부터 격이 달랐다. 받드는 신도 신화나 역사상 인물이 아니라 일왕을 위해 목숨을 마친 전몰자다. 때문에 특별한 신사라는 뜻의 ‘별격관폐사’로 육군성과 해군성이 공동으로 관리했다. 묘나 위패가 있는 것은 아니며 현재 246만6천여명의 명부가 보관돼 있다. 태평양전쟁 때 특공대원들의 ‘암호’는 “죽으면 야스쿠니에서 만나자”였다. 이날 만난 자매의 아버지도 마지막 편지에서 “커서 나를 보고 싶으면 야스쿠니로 오라”고 적었다. 일본 정부는 국가신도와 군국주의를 침략전쟁에 국민을 내모는 지주로 삼았는데 그 핵심적 존재가 야스쿠니였던 것이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목숨을 전장에서 잃어야 하는 참담함에서 야스쿠니에 모셔지는 영광으로 희생자·유족의 감정을 바꿔놓은 것을 ‘감정의 연금술’이라고 지적했다. 연합군사령부는 종전 직후 전쟁종교인 국가신도를 폐지하면서 야스쿠니를 불태우는 방안도 한때 검토하다 46년 일반 종교법인으로 바꾸는 데 그쳤다. 그러나 우익들이 전범의 명예회복과 야스쿠니 합사를 추진하면서 말썽이 불거졌다. 자민당 우익들은 야스쿠니를 다시 국가가 관리하도록 하는 법안을 69년부터 5차례나 냈으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좌절되기도 했다. 후생성은 전범을 공무로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에이(A)급 전범을 포함한 합사 예정자 명부를 야스쿠니에 보냈다. 전범 합사를 사실상 정부가 주도한 것이다. 비시(B·C)급 전범은 59년부터 합사됐다. 에이급 합사도 70년 결정됐지만, 국민감정 때문에 78년으로 늦춰졌다. 에이급 전범이란 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 당시 총리, 이카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총참모장 등 28명으로, 사형 7명, 무기 16명 등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 가운데 14명이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다. 에이급 전범 합사 이후 일왕은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했고, 역대 총리들은 개인자격을 전제로 참배했다. 패전 40년인 85년 8·15 때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공식 참배를 시도했다가 외교적 마찰로 비화돼 이듬해 중단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공약사항으로 내걸고 2001년부터 연 1회 참배를 강행해오고 있다. 고이즈미 올해도 참배 강행? 에이급 전범 분사와 별도의 국립추도시설 건립이 대안으로 제기된 상태다. 분사에 대해선 자민당에서도 동조 의견이 많고, 전범 유족들도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신사 쪽의 반발이 거세고, 도조의 손녀도 “침략전쟁을 인정하는 게 된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신사 쪽은 ‘방석론’을 펴고 있다. 야스쿠니에선 하나의 방석에 신으로 모신 전몰자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일단 합사된 이상 일부만 따로 떼낼 수 없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국립추도시설 건립은 2001년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 직후 논의가 본격화했다.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의 사적 자문기구에서 이듬해 12월 무종교 전몰자 추도시설이 필요하다는 제언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야스쿠니를 형해화할 우려가 크다는 우익의 반대로 사실상 사문화됐다. 설령 에이급 전범을 분사하더라도 침략주의의 상징이라는 야스쿠니의 성격엔 그다지 변함이 없고, 별도 추도시설이 설립돼도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논란이 재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방안이 궁극적 해법이 될지는 분명치 않다. 최대 관건인 고이즈미 총리의 올해 참배 여부에 대해선 강행을 점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나카소네를 비롯한 전직 총리들, 자민당 주요 인사들까지 외교마찰 악화를 피하기 위해 참배 중단의 결단을 내리도록 총체적 압박에 나섰다. 그럼에도 고이즈미가 고집을 꺾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야스쿠니 해법의 실질적 모색은 내년 9월 고이즈미 임기가 끝난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글·사진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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