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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결국 욕망의 포로는 미몽에서 깨어났어

등록 2010-11-05 20:43

그대를 잃은 날부터
그대를 잃은 날부터
자석 양극처럼 다른 남녀 사랑담
세상 향한 작가의 회의 담았지만
욕망에 이용되는 면모는 못 그려
그대를 잃은 날부터
최인석 지음/자음과모음·1만2000원

최인석(57)의 소설 <그대를 잃은 날부터>는 날씨에 대한 강렬한 묘사로 문을 연다. 주인공 준성이 햇볕과 무더위에 쫓겨 단골 카페에 들어가 맥주 한잔을 마시는 사이, 바깥 세상에는 먹구름이 몰려들고 굵은 빗방울에 이어 우박이 쏟아져 내린다. 상점 간판에 구멍이 뚫리고 가로수들이 당장 뽑혀 나갈 듯 허공을 향해 몸부림치며 네거리의 신호등이 한꺼번에 꺼져 버리는 상황은 어쩐지 종말의 느낌을 진하게 풍긴다.

그 상황 속에 준성에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창백한 얼굴을 한 낯선 여자가 앞자리에 와 쓰러지듯 주저앉아서는 저를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것 아닌가. “뭔가 슬픔과 고통, 외로움을 동반한 냄새(…)위기의 냄새, 불온한 냄새, 위험한 냄새, 자포(自暴)의 냄새”를 풍기는 서진. 이 여자를 향한 준성의 사랑에 수반되는 모험과 갈등, 위기와 그 극복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두 사람의 사랑이 모험과 위기를 거느리게 된 까닭은 그들이 자석의 양극만큼이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모델 지망생인 서진이 광고와 소비로 대표되는 욕망의 메커니즘을 무반성적으로 추종하는 반면, 준성은 체제에 협력하기 싫다며 다니던 통신회사를 때려치우고 해킹을 하거나 시나리오를 쓰면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자석의 두 극이 실제로는 서로를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것처럼, 두 사람의 차이는 상대에 대한 관심과 매혹의 근거가 된다.

서진이 온몸으로 풍기는 불길한 냄새를 무릅쓰고 준성이 그 여자를 집에 데려다주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종내는 두 사람이 같이 살기에 이른 것은 그런 관심과 매혹의 결과였다. 서진은 타고난 미모와 몸매로 벼락 스타를 꿈꾸며 광고 감독이니 방송국 피디니 등과 난잡하게 어울리는 한편(준성과 카페에서 마주친 날도 그런 난리 굿판의 뒤끝이었다) 홈쇼핑 속옷 광고 모델로 활동중이다. 게다가 그 자신 맹렬한 쇼핑광인 서진은 명품 옷가지와 가방, 구두는 물론 쓸모도 없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바람에 카드 빚과 사채에 쫓기는 신세.

“벌거숭이 몸으로 그녀는 이놈의 세상에 물거품 같은, 흙탕물 같은 욕망을 만들어 보태고, 스스로 그 욕망의 물거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반면 준성이 꿈꾸는 삶은 ‘이놈의 세상’과 가능한 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최소한의 일, 최소한의 생계, 최소한의 삶, 그런 것이 준성이 생각한 최선의 삶이었다.(…)준성은 기꺼이 실패를 택할 것이다. 실패는 적어도 윤리적이었다. 한 사람이 실패하면 그가 실패한 그만큼 이 세계는 더 사악해지는 데 실패할 것이다.”

준성이 택한 ‘실패’는 물론 한계가 뚜렷한 실패라 해야 할 것이다. 어찌 됐든 그는 크게 생계 걱정을 하지 않으며, 서진이 진 몇천만원 규모의 빚을 대신 갚아 줄 정도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다.

소설 뒷부분에서 준성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에 대해 궁금해하는 서진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세계의 생김생김이 늘 인간을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만들고 모든 인간관계를 사고파는 거래로 전락시키고 타락시킨다는 게 이 작가의 생각이야.” 준성이 읽고 있는 책의 저자를 최인석 자신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과 행태에 대한 환멸과 증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모색과 실천에 대한 도저한 회의는 최인석 소설의 유구한 테마에 해당한다.

소설가 최인석
소설가 최인석
그런 작가의 세계관은 준성의 태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셈인데, 그가 세상을 샅샅이 지배하는 욕망이라는 괴물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그 자신 괴물에게 먹히고 이용당하는 면모는 소설에서 충분히 그려지지 못한 느낌이다. 온갖 곡절을 거치면서도 그의 생각과 사람됨은 크게 변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이 소설은 변형된 신데렐라 이야기로 읽힐 소지도 없지 않다. 반면, 서진에게서는 뚜렷한 ‘발전’의 양상이 보인다. 준성 친구 정우가 감독한 영화의 단역을 맡은 서진의 대사 중에 “나라 해서 꼭 이렇게 살고 싶은 건 줄 알아?”라는 것이 있는데, 이 말은 그대로 서진의 주제곡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제를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겠다. 욕망의 대리인이자 그 포로였던 서진이 미몽에서 깨어나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 거기에는 물론 준성의 순애보 같은 사랑이 큰 몫을 했을 테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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