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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수돌의 전화 한 통 50년전 기억꾸러미를 들쑤시다

등록 2005-06-23 19:40수정 2005-06-23 19:40

 문순태 장편 <41년생 소년>
문순태 장편 <41년생 소년>
광주의 소설가 문순태(64)씨가 소년의 눈에 비친 전쟁 이야기를 담은 장편 <41년생 소년>(랜덤하우스중앙)을 내놓았다.

“내 삶의 중심에는 굶주리고 나약한, 상처투성이 소년이 살고 있다. 소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다.”

삶의 중심엔 상처투성이 소년이

책의 서문에서 작가는 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 겪은 전쟁이 그 뒤의 삶을 지배해 왔으며 그 ‘공포의 통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이어지는 소설 본문은 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입산했다가 행적이 묘연해졌던 친구 ‘수돌’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문을 연다. 전화를 받을 무렵, 정년을 앞둔 대학교수 ‘귀남’은 책상과 책장을 정리하며 자신의 삶 또한 서서히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자 애를 쓰고 있는 참이다. 사십대의 지난 한때 남자로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여자의 편지를 수습하면서는 이제 우울증에 걸린 아내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속다짐을 놓기도 한다. 사랑이란 격렬함이 아니라 온유함이라는 인식은 경험과 연륜이 그에게 가져다 준 지혜라 해야 하겠다.

“사랑은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고, 가슴 설렘이나 팽팽한 긴장도 아니며, 광풍과도 같은 열정이나 혹독한 시련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사랑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고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해서 밤에 돌아오는 일상의 삶 속에 깊숙이 스며 있다는 것을. 사랑은 꽃피는 봄날의 평화로운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29~30쪽)

이처럼 늦가을 나무가 잎을 떨구듯 차분하게 지난 삶을 정리하려던 그에게 수돌의 돌연한 전화 한 통은 그야말로 “과거로부터 온 유령”(11쪽)과도 같다. 이 유령은 귀남의 뒷덜미를 잡아채서는 ‘혹시 잊은 것이 있지 않냐’고 종주먹을 들이댄다. 귀남 자신 애써 눌러 온 반세기 전의 기억을 그의 눈앞에 화라락 펼쳐 놓으면서 ‘이것들은 다 어찌 하려느냐’ 묻는 형국이다. ‘이것들을 놔두고는 정리란 애저녁에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유령의 방문은 곧 기억의 호출이라 할 터. 수돌의 전화를 계기로 귀남의 의식은 반세기 전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으로 거슬러 오른다. 마치 연어가 알을 낳고 마침내 삶을 마감하기 위해 모천을 거슬러 오르듯,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 삶이 비롯된 원초적 지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리하여 그곳에서 만난 기억은 어떤 모습이었던가.

정년 앞둔 귀남
마지막 사랑의 열정과
지난 삶을 정리하려는데…
과거로부터 온 유령
뒷덜미를 낚아채
전쟁통으로 밀어넣다

“귀남아, 너 진짜로 배고픈 것이 죽는 거만치나 무섭다는 거 모르쟈. 너무 배가 고프면 눈물이 나오다가 나중에는 몸뚱이가 진흙맹키로 무거워짐시로 땅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것 같어야. 그러다가 점점 내 몸이 허새비맹키로 속이 비고, 몸속에 검불만 가득 들어 있는 것맹키로 가벼워짐시로 순식간에 가루가 되야 갖고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어야. 그러다가 눈만 감으면 꼴까닥 숨이 끊어질 것만 같어.”(97쪽)

이 눈물나는 대사는 가난해서 제때 끼니조차 챙겨먹지 못하던 어린 수돌이 동갑내기 동무 귀남에게 들려주는 허기의 묘사다. 부모 구존하고 비교적 형편이 나았던 귀남은 다만 “내 친구 수돌이는 왜 끼니도 제대로 못 찾아 먹을 정도로 가난하고, 봉구 아제는 무엇 때문에 아직 장가를 못 가는지”(58쪽) 어린이다운 궁금증을 품을 따름이지만, 그러면서 가난하고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수돌이를 가장 친한 동무로 삼아 어울릴 정도의 선함을 보일 따름이지만, 그의 궁금증과 선한 마음으로도 죽음에 이를 만큼 치명적인 허기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전쟁.

수돌이에게, 그리고 마을의 촉망받던 청년 지식인들에게 전쟁이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불평등을 해소할 기회로 다가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 때문이었다. “표정과 성격이 밝아진 수돌이는 말수도 많아졌고 아이들하고도 잘 어울렸다.”(115쪽)

전쟁이 가져 온 변화가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으리라. 그러나 운동하는 물체는 외부에서 다른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수돌의 변화라는 운동은 자기 나름의 탄력을 받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어린 빨치산이 꿈꾸던 세상은…

그는 무고한 사내가 ‘완장’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에 적극 개입하고, 어린 나이에 빨치산에 들어가서는 “포로로 잽힌 토벌대 놈한테서 빼낸 금이빨”(213쪽)을 귀남에게 선물로 준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아직도 네 검정 고무신 한 짝을 갖고 있단다”(214쪽) 천진하게 속삭이는 것인데, 어린아이다운 순수한 우정의 증표로 귀남이 수돌에게 주었던 고무신 한 짝과 끔찍하게도 스스로 살아 있는 포로의 입에서 대검으로 떼어냈다는 금이빨의 잔혹함은 수돌의 내면에서 어떻게 양립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귀남은 토벌대의 소개작전 때 불에 타 죽은 돼지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구워 먹으면서 “자신이 마치 괴물 같다는 생각을 했”(163쪽)다지만, 고무신과 금이빨을 화해롭게 공존시키는 수돌의 내면이야말로 ‘괴물의 탄생’이라 이를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귀남은 문제를 전적으로 수돌에게 귀속시키는 대신, “수돌이를 딴 사람으로 만든 세상이 무서웠다”(216쪽)고 토로할 정도로는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총을 든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141쪽)하는 그는 겁쟁이라기보다는 원칙적 평화주의자라 해야 마땅해 보인다.

인민군의 마을 진주 당시 아버지가 강압에 못 이겨 인민위원장 감투를 썼던 일 때문에 귀남 일가는 시종 토벌대에 쫓기고 차례로 구성원을 잃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결국 유격대의 공격에 희생당하고 만다. 마지막 공격을 당하기 전에 아버지는 “인자 새 세상이 온다고 해도 믿지 않기로 했네”(267쪽)라고 이념에 대한 회의를 표하는 것인데, 아마도 월북했다가 반세기 만에 다시 ‘탈북’한 수돌의 다음 연락을 기다리며 귀남이 곱씹는 상념은 아버지의 그런 회의에 곧바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나는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그를 기다리는 이유는 소년 수돌이를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꿈꾸어온 세상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298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순태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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