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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돋아나고 스러지는 숲, 그리고 아버지…

등록 2010-11-12 20:28수정 2010-11-12 20:44

김훈(62)
김훈(62)
김훈(62)의 장편 <내 젊은 날의 숲>에는 생명과 죽음이 공존한다. 주인공 조연주는 민통선 너머 수목원 소속으로 꽃과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는 미혼 여성. 철 따라 피어나는 꽃과 나무의 모습을 가능한 한 실제에 가깝게 그려야 한다. 그의 상관인 안요한 실장의 표현마따나 “개별적 생명의 현재성을 그리는 일”이 그의 임무.

그런가 하면 그는 인근 군부대가 6·25 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하면서 발굴된 유골의 내부 구조를 역시 세밀화로 그려 달라는 업무 협조 요청을 받고 그에 응한다. 그러니까 그는 한편으로는 생명의 현재성을 화폭에 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셈이다.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수목원의 조연주가 생명과 죽음의 이중주를 세밀화로 옮기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이행해 간다. 소설이 시작될 때, 군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죄와 알선수재죄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가 하위직 공무원의 그 작은 직권으로 성병에 걸린 접객업소 여종업원을 협박하거나 검진증을 팔아먹고 단속정보를 미리 빼돌리고 영업정지처분을 막아주거나 풀어주면서 벌어온 돈이 나의 생애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인지”를 딸은 뒤늦게 깨닫는다.

서울에서 남해안의 교도소로 이감됐던 아버지는 형기를 육개월 남겨 놓고,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가석방 형식으로 출소한다.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고 거추장스러워 어머니는 아버지를 별도의 아파트에 ‘격리’시킨 채 간병인을 붙여 준다. 간병인한테서 들은 아버지의 증세를 전화를 통해 딸에게 전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서는 김훈의 단편 <화장>에서의 잔인한 병증 묘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너네 아버지, 변비가 왔어. 똥이 차돌멩이처럼 굳어져서 간병인이 꼬챙이로 파냈어. 팠더니 쪼가리로 떨어지더래. 새카맣고 딱딱했는데, 거기 밥알이 박혀 있었대. 똥에 물기가 전혀 없는데도 냄새는 칼로 찌르는 것 같대.”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문병을 간 외동딸에게 아버지가 하는 말이라고는 ‘괜찮다’와 ‘미안허다’ 두 마디가 전부였다.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했지만, 딸이 보기에는 “그 두 마디만으로도 한 생애를 요약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가 가석방되었을 때 집을 찾아왔던 담당 형사는, 가석방이란 어디까지나 교도소 밖에서도 형을 계속 집행하는 것일 뿐 형 집행이 마감되자면 잔여 형기가 끝나거나 당사자가 죽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딸은 또 이렇게 생각한다. “아버지의 최근 몇 년 동안의 삶은 교도소에서 복역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들의 말과 생각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보면 어떨까.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일종의 형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의 이감에서 시작해 그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소설의 숨은 주제를 ‘아버지로 산다는 것’이라 이해하는 독법이 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젊은 미혼 여성을 주인공 삼은 소설에서 낭만적인 연애를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조연주와 인근 부대의 학사장교 김민수 중위 사이에는 과연 꽃눈 같은 연정이 싹튼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두 남녀의 태도는 자못 신중하고 점잖다. 남자를 향한 여자의 관심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의 대학 전공과 제대 후의 진로, 그의 독서, 그가 좋아하는 음식 같은 것들을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마음은 다만 이렇게 표출될 따름이다. “제 명함 잘 넣으셨지요?”

연애의 지지부진함이 일말의 아쉬움을 준다면, 김훈 득의의 문장들은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사물과 사태의 본질에 대해 알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다는 특유의 ‘엄살’을 소설 곳곳에서 만나는 반가움은 생각보다 크다.

“꽃에 대한 어떠한 언어도 헛되다는 것을 나는 수목원에 와서 알게 되었다. 꽃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꽃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흐린 연두색의 먼 저쪽 끝에서 이름 부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색이 배어나와서 내가 있는 쪽 세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나무의 겨울 꽃눈에 대해)

제목은 하덕규(시인과촌장)의 노래 <숲>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제목이 멀리서 등대처럼 소설을 끌어 주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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