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엘피판 시절의 더블 앨범처럼
단편 18편을 두 권에 나눠 묶어
사회적 약자 향한 따스함 담아
단편 18편을 두 권에 나눠 묶어
사회적 약자 향한 따스함 담아
더블 A, B박민규 지음/창비·각 권 1만2500원
박민규(42)의 소설집 <더블>은 제목처럼 두 권으로 이루어졌다. 장편이 아닌 단편 묶음이 두 권으로 나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인데, 작가는 “엘피(LP) 시절의 더블 앨범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노라고 밝혔다. 여느 책에 비해 가로가 길고 세로는 짧은 형태 역시 음반을 연상시킨다. 첫 소설집 <카스테라> 이후 5년여 동안 발표한 단편 24편 가운데 여섯 편을 뺀 열여덟 편이 두 권에 아홉 편씩 나뉘어 묶였다.
장편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핑퐁>, 그리고 소설집 <카스테라> 등 전작에서도 그러했지만, 이번 소설집에서도 박민규의 상상력은 시공간을 가없이 종횡한다. 기원전 1만7000년으로 거슬러오르는가 하면(<슬>), 지금으로부터 1000년 뒤의 미래를 다루기도 한다(<굿모닝 존 웨인>). 미국 알래스카(<루디>)나 해저 1만9251미터(<깊>)를 무대로 삼은 작품은 어떤가. 서울 한복판 하늘에 직경 10킬로미터의 아스피린이 떠 있기도 하며(<아스피린>), 혜성과의 충돌로 지구가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기도 하다(<끝까지 이럴래?>). 자신이 전생에 마릴린 먼로였으며, 우주인들과 교접해서 아르마딜로와 ‘태권소년’, ‘별들이소곤대는’을 낳는다는 내용의 ‘자전소설’ <축구도 잘해요>는 가히 상상력의 끝 간 데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소설집 <더블>에서는 이렇듯 파격적인 상상력과 나란하게 노인과 청년,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향한 연민의 시선이 공존한다. 이 점이야말로 박민규 소설의 핵심에 해당하거니와, 에스에프나 무협지 같은 장르소설의 문법을 차용한 작품들에서도 장르적 틀을 벗겨 놓고 보면 그 안에는 역시 약자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깃들어 있다. <누런 강 배 한 척>과 <낮잠>은 나란히 생의 말년에 이른 노인을 등장시킨다. <누런 강 배 한 척>에서 주인공은 29년 동안 다닌 회사를 4년 전에 퇴직한 이다. “한 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 일을 해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준 뒤 그에게 남은 것은 집 한 채와 치매에 걸린 아내뿐.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기 때문에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그에게 딸은 지방대학 교수직을 얻는 데 필요하다며 다시 손을 내민다. 집을 팔고 전세로 전환해서 남은 차액을 딸에게 건넨 뒤 그는 아내를 차에 태우고 길을 나선다. “단 한번이라도 삶을 즐긴 후 나는 아내와 함께 죽고 싶었다.” 한 달 동안 서해와 동해를 돌며 여행을 한 그는 마지막이라고 점찍은 바닷가 호텔에 여장을 푼다. 가방에는 반년 전부터 모아 온 수면제가 들어 있다…. <낮잠>의 노인은 요실금에 걸려 기저귀를 찬 채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엄연히 자식들이 있지만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생활이 있다는 걸” 안 뒤였다. 아내는 5년 전 자궁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혼자 남은 그에게는 “아내의 자궁에서 뻗어나온 세상도 이미 커다란 암이 되어 있었다.” 요양원에서 그는 고교 시절 짝사랑했던 소녀를 만난다. 문학제에서 <별 헤는 밤>을 낭송하던 소녀는 지금은 치매에 걸려 옛 기억은 물론 온전한 정신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그에게는 지나간 청춘이 되돌아온 듯했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왔다, 온 것이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고,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다.”
<낮잠>의 주인공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청춘이지만, 막상 청춘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청춘이 버겁고 불안하기만 하다. 동반 입대를 앞둔 네 청년의 즉흥적인 바다 여행을 그린 <비치보이스>에서도 그렇지만, 지방의 소규모 홍보 대행사 직원을 등장시킨 <굿바이, 제플린>에서 청춘의 불안과 불만은 임계점을 향해 치닫는다. 그 청춘이 좀 더 나이가 들면 죽겠다며 한강대교 아치에 오르고(<아치>), 무능한 비정규직의 울분을 가정 폭력으로나 해소하려 한다(<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근처>)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누런 강 배 한 척>) 수시로 행을 가르고 여백을 두는가 하면 글자 크기와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거두는 특유의 스타일 속에, 삶에 대한 잔잔한 통찰을 담은 문장들이 눈길을 잡는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더블 A, B
더블 A, B
소설집 <더블>에서는 이렇듯 파격적인 상상력과 나란하게 노인과 청년,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향한 연민의 시선이 공존한다. 이 점이야말로 박민규 소설의 핵심에 해당하거니와, 에스에프나 무협지 같은 장르소설의 문법을 차용한 작품들에서도 장르적 틀을 벗겨 놓고 보면 그 안에는 역시 약자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깃들어 있다. <누런 강 배 한 척>과 <낮잠>은 나란히 생의 말년에 이른 노인을 등장시킨다. <누런 강 배 한 척>에서 주인공은 29년 동안 다닌 회사를 4년 전에 퇴직한 이다. “한 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 일을 해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준 뒤 그에게 남은 것은 집 한 채와 치매에 걸린 아내뿐.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기 때문에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그에게 딸은 지방대학 교수직을 얻는 데 필요하다며 다시 손을 내민다. 집을 팔고 전세로 전환해서 남은 차액을 딸에게 건넨 뒤 그는 아내를 차에 태우고 길을 나선다. “단 한번이라도 삶을 즐긴 후 나는 아내와 함께 죽고 싶었다.” 한 달 동안 서해와 동해를 돌며 여행을 한 그는 마지막이라고 점찍은 바닷가 호텔에 여장을 푼다. 가방에는 반년 전부터 모아 온 수면제가 들어 있다…. <낮잠>의 노인은 요실금에 걸려 기저귀를 찬 채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엄연히 자식들이 있지만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생활이 있다는 걸” 안 뒤였다. 아내는 5년 전 자궁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혼자 남은 그에게는 “아내의 자궁에서 뻗어나온 세상도 이미 커다란 암이 되어 있었다.” 요양원에서 그는 고교 시절 짝사랑했던 소녀를 만난다. 문학제에서 <별 헤는 밤>을 낭송하던 소녀는 지금은 치매에 걸려 옛 기억은 물론 온전한 정신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그에게는 지나간 청춘이 되돌아온 듯했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왔다, 온 것이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고,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다.”
<낮잠>의 주인공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청춘이지만, 막상 청춘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청춘이 버겁고 불안하기만 하다. 동반 입대를 앞둔 네 청년의 즉흥적인 바다 여행을 그린 <비치보이스>에서도 그렇지만, 지방의 소규모 홍보 대행사 직원을 등장시킨 <굿바이, 제플린>에서 청춘의 불안과 불만은 임계점을 향해 치닫는다. 그 청춘이 좀 더 나이가 들면 죽겠다며 한강대교 아치에 오르고(<아치>), 무능한 비정규직의 울분을 가정 폭력으로나 해소하려 한다(<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근처>)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누런 강 배 한 척>) 수시로 행을 가르고 여백을 두는가 하면 글자 크기와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거두는 특유의 스타일 속에, 삶에 대한 잔잔한 통찰을 담은 문장들이 눈길을 잡는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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