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평전-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진실추구 외길 마지막 육성 담아
“생전 월급쟁이가 된 기자들 통탄
리영희 민주언론상 제정되기를”
“생전 월급쟁이가 된 기자들 통탄
리영희 민주언론상 제정되기를”
〈리영희 평전-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책보세·2만8000원 “단재 신채호, 씨알 함석헌, 청암 송건호, ‘말갈’ 리영희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언론인의 정맥(正脈)을 지켜오셨다.” 김삼웅(사진) 전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5일 별세한 리영희 선생에게 바치는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쓴 <리영희 평전>은 책의 주인공과 함께 관에 들어가, 떠나는 길에 길동무가 됐다. 또 그는 고인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임한 인터뷰의 인터뷰어이기도 하다. 리영희가 걸은 길을 따라 걸으려 했기에 인연이 그토록 겹친 것일까. 지난 9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김 전 관장은, 마침 “가장 존경한다”는 단재 신채호의 탄생 130돌 기념 학술행사에 참석하고 난 직후였다. 그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나온 <리영희 평전>이 벌써 3쇄에 들어간다”며 “선생의 삶과 생각이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리영희의 글을 꼼꼼히 읽고 스크랩하며 “사숙”(私淑)하기만 했던 김 전 관장은, <서울신문>(당시 <대한매일>) 주필로 있을 때인 1998년께 첫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신년특집 대담 초청에 응하지 않던 그를 “일제 치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뒤를 제대로 잇는 신문이 되려 한다”고 설득한 것이다. 독립기념관장이 된 뒤로는 내부 교양강좌에 꾸준히 그를 초빙했고, 한국 근현대사 인물 평전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원고를 보내 의견을 구했다. <리영희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은 뒤로는 여섯 달 동안 한 달에 두 차례씩 경기도 산본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 인터뷰를 했다. 리영희 선생은 병상에서도 <오마이뉴스>에 연재되던 그의 글을 출력해서 읽어볼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평전을 쓰면서 모아뒀던 리 선생의 글들을 포함해 수백 권의 책을 봤습니다. 특히 선생께서 참고하라며 직접 보내주신 합동통신 근무 시절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했던 원고 등 ‘날것’의 자료와 사진들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리영희 평전>에서 김 전 관장이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리영희의 모습은, “어떤 유혹과 탄압에도 흔들리거나 짓밟히지 않겠다는 의지와 자기 삶의 원칙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는 단재 신채호를 비롯해 김 전 관장이 흠모하는 인물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는, 참 지식인 또는 선비·지사의 고갱이다. 일제 때인 1929년에 태어나 평안도 시골 벽촌에서 소년기를 보낸 리영희는, 6·25전쟁, 이승만과 박정희, 신군부의 독재정권 등 암울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맨몸으로 살아온 시대의 증인이다. 6·25전쟁 때부터 7년 동안 통역장교로 복무하며 영어 실력을 키웠던 그는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입사하며 본격적인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다른 언론인들이 권력에 부화뇌동하며 제 몸의 안위를 도모할 때, 그는 언론사에서 두 번, 대학에서 두 번 쫓겨나고 다섯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그런 리영희의 삶의 원칙은 ‘진실 추구’ 하나로 압축된다. 김 전 관장은 “리영희의 이름 앞에 하나의 관용어만 필요하다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다. 독재자들이 자기 잇속만을 위해 분단현실을 왜곡하고 ‘맹목적 애국주의’를 강요할 때, 리영희는 이성을 무기로 삼아 철저한 논증을 통해 그들이 만든 우상들을 낱낱이 깨뜨렸다. 그러면서도 어떤 이념과 주의에도 갇혀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90년대 현실 사회주의 정권들이 붕괴할 때에도 리영희의 비판 정신은 변함이 없었다. 김 전 관장은 “선생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암’을 치유하는 항생제로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중시했던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리영희의 ‘현재적 의미’를 묻자, 김 전 관장은 마지막 인터뷰 얘기를 꺼냈다. 그때 리영희는 “이명박 정권은 (사상 최악의) 미국의 노예정권”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전 관장은 “당시에는 ‘병상에 계셔서 약간 거친 표현을 쓰시나’ 했는데, 남북 대결주의 고조와 ‘다 내주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 등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무엇인가 꿰뚫어보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리영희가 한평생 싸웠던 우상들이 아직도 춤을 추고 있는데, 이에 맞설 비판적 지성은 과연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언론, 특히 보수신문들은 70~80년대보다 더 타락했다”며 “월급쟁이가 된 기자들이 ‘언론 동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리영희 민주언론상’을 꼭 제정했으면 한다”며 “평전으로 얻는 수익 일부를 내어 도울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평전 저술을 주된 글쓰기로 삼고 있는 김 전 관장은, 최근 집필을 끝낸, 반민특위 위원장이었던 김상덕의 평전을 비롯해 허균, 김시습 등 다양한 인물의 평전을 계획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필생의 업으로 꼽는 것은 <다산 평전>이라 했다. 대학교 다닐 때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고 싶었으나 기회를 찾지 못했는데, 역사학자 카가 쓴 <도스토옙스키 평전>을 보고 지적 갈증을 해소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대중적으로 널리 읽힐 수 있는 평전 저술을 염두에 두고 자료 수집과 공부를 계속해왔다는 것. 그는 “평전을 너무 빨리 써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지난 30년 동안 공부한 내용을 기초로 삼고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며 웃고 나선, “여전히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김삼웅 지음/책보세·2만8000원 “단재 신채호, 씨알 함석헌, 청암 송건호, ‘말갈’ 리영희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언론인의 정맥(正脈)을 지켜오셨다.” 김삼웅(사진) 전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5일 별세한 리영희 선생에게 바치는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쓴 <리영희 평전>은 책의 주인공과 함께 관에 들어가, 떠나는 길에 길동무가 됐다. 또 그는 고인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임한 인터뷰의 인터뷰어이기도 하다. 리영희가 걸은 길을 따라 걸으려 했기에 인연이 그토록 겹친 것일까. 지난 9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김 전 관장은, 마침 “가장 존경한다”는 단재 신채호의 탄생 130돌 기념 학술행사에 참석하고 난 직후였다. 그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나온 <리영희 평전>이 벌써 3쇄에 들어간다”며 “선생의 삶과 생각이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리영희의 글을 꼼꼼히 읽고 스크랩하며 “사숙”(私淑)하기만 했던 김 전 관장은, <서울신문>(당시 <대한매일>) 주필로 있을 때인 1998년께 첫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신년특집 대담 초청에 응하지 않던 그를 “일제 치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뒤를 제대로 잇는 신문이 되려 한다”고 설득한 것이다. 독립기념관장이 된 뒤로는 내부 교양강좌에 꾸준히 그를 초빙했고, 한국 근현대사 인물 평전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원고를 보내 의견을 구했다. <리영희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은 뒤로는 여섯 달 동안 한 달에 두 차례씩 경기도 산본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 인터뷰를 했다. 리영희 선생은 병상에서도 <오마이뉴스>에 연재되던 그의 글을 출력해서 읽어볼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평전을 쓰면서 모아뒀던 리 선생의 글들을 포함해 수백 권의 책을 봤습니다. 특히 선생께서 참고하라며 직접 보내주신 합동통신 근무 시절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했던 원고 등 ‘날것’의 자료와 사진들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리영희 평전>에서 김 전 관장이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리영희의 모습은, “어떤 유혹과 탄압에도 흔들리거나 짓밟히지 않겠다는 의지와 자기 삶의 원칙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는 단재 신채호를 비롯해 김 전 관장이 흠모하는 인물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는, 참 지식인 또는 선비·지사의 고갱이다. 일제 때인 1929년에 태어나 평안도 시골 벽촌에서 소년기를 보낸 리영희는, 6·25전쟁, 이승만과 박정희, 신군부의 독재정권 등 암울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맨몸으로 살아온 시대의 증인이다. 6·25전쟁 때부터 7년 동안 통역장교로 복무하며 영어 실력을 키웠던 그는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입사하며 본격적인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다른 언론인들이 권력에 부화뇌동하며 제 몸의 안위를 도모할 때, 그는 언론사에서 두 번, 대학에서 두 번 쫓겨나고 다섯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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