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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백암은 유교 개혁을 꿈꿨다

등록 2010-12-16 08:27수정 2010-12-16 14:21

이종란(성균관대 철학과 박사)씨
이종란(성균관대 철학과 박사)씨
1910년 출간 직후 금서로 당시 지식인의 고뇌 담겨
박은식 선생의 ‘왕양명실기’ 옮긴 이종란씨

구한말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백암 박은식 선생은 1910년 <왕양명실기>라는 한문으로 쓴 책을 펴냈다. 중국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의 삶과 사상을 주제로 삼은 책이다. 내놓자마자 서슬 퍼렇던 일제로부터 판매금지를 당했던 이 책은 100년이 지난 올해에야 우리말로 번역돼 세상에 나왔다. 제국주의 침략이 정점에 달했던 이때에 백암은 왜 하필 양명학에 대한 책을 펴냈을까?

지난 13일 서울 내발산초등학교 앞에서 만난 이 책의 옮긴이 이종란(성균관대 철학과 박사)씨는 “백암은 서양의 종교개혁처럼 주자학 일변도의 전통 유교를 개혁하기 위해 양명학을 공부했다”며 “이 책을 통해 당시 지식인의 절절한 사상적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세기 서세동점에 대항했던 움직임은 크게 위정척사, 애국계몽, 민중운동 등 세 가지 갈래로 나눠볼 수 있다. 원래 정통 주자학을 배웠던 백암은 40살 되던 해인 1898년 독립협회 활동을 계기로 애국계몽 운동을 펼치게 됐고, ‘민족자강’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혜강 최한기 등 19세기 한국 철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씨는 이미 1990년대에 학회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 책을 만났다고 한다. 주자학을 건국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지배층은, 전란을 겪은 뒤 주자학 통치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굳혔다. 때문에 중국에선 명나라 때부터 기초를 닦은 양명학이 조선에선 제대로 발붙일 수 없었다고 한다. “허균, 정제두, 정인보 등 조선에도 양명학 계보가 있긴 하지만 드러내놓고 공부한 사람은 없습니다. 양명학에 대한 공식적 연구는 백암이 처음인 셈이죠.” 이씨는 관심을 갖고 번역에 몰두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올해에야 숙원을 이루게 됐다.

주자학과 구별되는 양명학의 특징은, 도덕적 법칙을 바깥 사물이 아닌 마음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왕수인은 ‘양지’(良知)라고 부르는 도덕적 이성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었으며, 이를 확충하기 위해 지행합일 등 실천을 강조했다. 양명학은 청나라 때 고증학의 부흥으로 잠시 기세가 꺾였다가, 청말에 이르러 그 개혁적 성격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서 다시 조명을 받았다. 백암 역시 중국의 량치차오와 일본의 학자들로부터 양명학을 접했다고 한다.

백암은 국권을 빼앗기는 등 비참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논리의 필요성에 따라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특히 서양이 종교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전했다고 인식한 백암은 민족 내부에서 그와 비슷한 계기를 찾으려 했고, 이는 ‘유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유교구신론으로 발전했다. 이씨는 “양명학에 대한 공부도 이런 사상적 배경과 맥락이 같다”고 말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과연 유교를 현대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이라고 한다.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라고 하면, 정신에 해당하는 동도는 그대로 두고 실용적인 서양 기술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강한데, 백암은 서양의 종교개혁에 맞먹는 내부적인 사상의 혁신을 필요하다고 보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회진화론의 한계나 부작용도 뚜렷하고, 다양한 시도들이 다 적절했다고 보긴 어렵다”면서도 “당시 어려웠던 시대 조건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어떤 절박한 노력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기록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꾸준히 공부를 이어가고 있는 이씨는, “요즘엔 서양의 천문우주학을 동양에 소개했던 문헌들을 연구하고 있다”며 “기회가 닿으면 이것 역시 번역본을 내보고 싶다”고 말했다.


글 최원형 기자,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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