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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인이 매만져 다시 길을 찾은 언어들

등록 2011-01-14 21:25수정 2011-01-14 21:29

시인 천양희
시인 천양희
칠순 천양희씨의 일곱번째 시집
삶의 비명같은 말의 유희 도처에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천양희 지음/창비·7000원>

어느새 세는 나이로 칠순에 이른 시인 천양희가 일곱 번째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를 묶어 냈다. 지난 시집 <너무 많은 입> 이후 6년 만인데, 제목은 <어처구니가 산다>는 시에서 따왔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어처구니가 산다> 첫 연)

부사 우두커니를 명사처럼 사용한 시집 제목은 비문임에 분명하지만, 언어를 매만져서 새로운 꼴로 빚어내는 일은 시인의 양보할 수 없는 특권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말장난 또는 언어유희라 할 대목들이 시집 도처에서 보이는 것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벽만이 벽이 아니라/ 때론 결벽도 벽이 되고/ 절벽 또한 벽이지요/ 절망이 철벽 같을 때/ 새벽조차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지요”(<벽과 문> 부분)

“사과를 깎다 생각한다 사과!/ 사과 한알 깎았을 뿐인데/ 잘못한 일 생각나/ 그 사과 한번을/ 깍듯이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가/ 붉은 사과 한알보다 더 붉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왜 몰랐을까> 전반부)

앞의 인용시에서는 결벽과 절벽, 새벽 같은 어휘들이 벽의 다양한 종류들로 의미 전환을 이루고, 뒤의 시에서는 먹는 과일과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의도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런 말장난은 물론 단순한 유희 욕구의 소산일 수도 있지만, 시인이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비틀고 꼬집을 까닭은 없을 테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시인은 “정치를 치정으로 정부를 부정으로 사설을 설사로/ 신문을 문신으로 작가를 가작으로 시집을 집시로”(<거꾸로 읽는 법>) 뒤집어 읽는 버릇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특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도진다는 설명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말장난에는 심각한 원인이 없지 않은 것이다. “내 속에 나도 모를 비명이 있는 거”라는 시인 나름의 원인 분석을 참조한다면, 말장난은 때로 숨겨둔 비명이 정체를 감춘 채 분출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틈만 나면 말장난을 일삼는 시인이지만, 특히 바다와 바닥에 관한 장난은 시집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고 있어 주목된다.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 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 친 수평선을 보겠네”(<불멸의 명작> 앞부분)

“자식들에게 바치느라/ 생의 받침도 놓쳐버린/ 어머니 밤늦도록/ 편지 한 장 쓰신다/ ‘바다 보아라’/ 받아보다가 바라보다가// 바닥 없는 바다이신/ 받침 없는 바다이신”(<바다 보아라>)

뒤의 시에서 ‘받아’에서 ‘바다’를 거쳐 ‘바닥’으로 옮겨 가는 어휘의 연쇄적 연상이 인상적이라면, 앞의 시에서는 바다의 수평 또는 바닥이 “수직으로 치솟”는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가 있던 자리>라는 다른 시에서도 비슷한 이미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새가 있던 자리> 부분)

시집 맨 앞에 나오는 <들>이 수평의 세계를 노래하는 반면, 맨 뒤에 실린 <옷깃을 여미다>가 수직적 상승 또는 초월의 욕망과 그 좌절에 바쳐진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들> 전문)

“비굴하게 굴다/ 정신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깃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옷깃을 여미다> 전문)

그렇다면 아무리 강직하고 경건하며 단단한 마음가짐으로도 끝내 이를 수 없는 별의 세계는 역시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고/ 시라는 씨앗 하나 남겨주었다”(<시(詩) 통장>), “너를 생각한 것이 나를 살렸다 시여!”(<생각은 강력한 마약>)라는 시인의 토로를 들어 보라. 그에게는 아직 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 곧 “시 쓰는 일”(‘시인의 말’)을 통해 그는 언제까지나 별에 다가갈 수 있기를 꿈꿀 것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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