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개의 봄
1월 22일 잠깐독서
아흔개의 봄
어머니가 돌아왔다. 2년 넘게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서 튜브로 음식을 받아먹으며 의식도 절로 사위어가는 듯했던 어머니가 어느 날 튜브를 걷어냈다. “야, 달다. 너무 달다. 더 먹자꾸나.” 숟가락을 되찾은 어머니는 과일즙에 황홀해하며 아흔살의 눈으로 혀로 세상을 다시 맛본다. <아흔개의 봄>은 퇴행성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보살피며 써내려간 예순살 아들 김기협의 시병기다.
어머니가 누구인가. 한국전쟁 중 남편이 갑작스럽게 괴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뜬 뒤 혼자서 네 자녀를 키우며 꼿꼿하게 학문과 생활을 지켜오던 어문학자 이남덕 전 이화여대 교수다. 아버지 역사학자 김성칠 교수가 남긴 유고를 36년 만에 <역사 앞에서>라는 이름으로 출간할 때까지 자식들에게까지 그런 유고가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겨왔던 어머니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자마자 돌연 2년 동안 외국으로만 쏘다녔던 어머니다. 아버지를 이어 역사학자로 살며 <밖에서 본 한국사> 같은 책들을 써온 아들은 수십년 동안 그분의 훌륭한 점보다 그분의 모순과 위선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왔노라고, 어머니가 무기력하게 누워 있게 되면서 비로소 시비지심이 사그라졌노라고 고백한다.
다시 돌아온 어머니는 예전 모습을 찾아가면서도 전과는 영 다른 사람이다. 아들을 똥강아지라고 부르며 기저귀를 다독이던 어머니가 이제는 아들에게 글자를 묻고 걸음마를 배운다. 어머니와 화해하고서야 자신과 세상과 화해할 길을 얻은 아들이 화답한다. 아들과 어머니가 이제는 생각이 한가지다. 김기협 지음/서해문집. 1만2900원.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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