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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판형의 파격…시의 공간, 너비를 품다

등록 2011-01-25 11:18

왼쪽부터 최승호, 허수경, 송재학 시인
왼쪽부터 최승호, 허수경, 송재학 시인
2배 커진 면적 ‘문학동네 시인선’
최승호·허수경·송재학 3권 출간
시집 가로로 눕혀 산문도 안정적
〈아메바〉
최승호 지음/문학동네·특별판 1만원, 일반판 8000원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지음/문학동네·특별판 1만원, 일반판 8000원

〈내간체를 얻다〉
송재학 지음/문학동네·특별판 1만원, 일반판 8000원

“수십 년 동안 굳어진 시집 판형에 일대 혁신을 단행했다. 오늘날의 시는 과거와 달리 행이 길어졌고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의 비중도 커졌다.(…)단형 서정시 형태에 최적화돼 있는 기존 판형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파격적인 판형의 시집 시리즈 ‘문학동네 시인선’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내세운 명분이다. <아메바>(최승호)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허수경) <내간체를 얻다>(송재학) 세 권을 무녀리 삼아 출범한 이 시리즈는 같은 시집을 특별판과 일반판 두 가지 형태로 만들었다. 게다가 기존 시집 두 권을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한 크기인 특별판은 본문을 가로 방향으로 눕혔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길이의 시행은 다음 행으로 넘어가지 않고 한 행 안에서 완결될 수 있게 됐다.

첫 권인 <아메바>는 이 시리즈의 형식적 실험을 시 자체로써도 뒷받침하는 듯 보인다. 시인은 자신의 지난 시집 열두 권에서 가져온 58개의 구절을 별도의 제목과 함께 왼쪽(특별판의 경우 위쪽)에 배치하고, 오른쪽(특별판은 아래쪽)에는 그 구절들을 자유롭게 변주한 서너 편의 이미지 놀이를 곁들였다. 가령 두 번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에 수록된 시 <설경>에서 따온 두 행과 그 변주 일부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눈썹도 코도 입도 다 버리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눈사람들의 봄날이 있다”(<21 어느 날>)

“사라진 눈사람들이 모두 부활해/ 북극의 대성당에서/ 성가를 부른다면 장엄하리라”(<21-3>)


“어느 날 나는/ 공겁(空劫) 밖의 사람이다”(<21-4>)

시인은 “일종의 문체 연습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난 시집의 구절들을 자유롭게 변주해 보았다. 상상력이 제멋대로 촉수를 뻗고 날뛰는 바람에 통일성이 부족한, 산만한 시집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 시적 공간은 한없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허수경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2005) 이후 6년 만에 나온 다섯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 역시 지난 시집과 마찬가지로 고고학 발굴 현장과 국제정치적 시야, 그리고 인간과 문명을 바라보는 미시적·거시적 관점이 혼재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메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내간체를 얻다〉
〈아메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내간체를 얻다〉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앞부분)

1992년 이후 독일에 머물며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는 시인은 이 시집과 자전적 장편 성장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 출간에 맞추어 무려(!) 10년 만에 일시 귀국했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와서 모든 게 낯설 줄 알았는데 다들 반갑게 대해 줘서 집에 온 느낌”이라며 “내 시가 갈수록 수다스러워지는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이번 시집의 넓은 판형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말했다.

송재학의 일곱 번째 시집인 <내간체(內簡體)를 얻다>는 지난 시집들보다는 한결 평이해진 언어로 죽음의 다양한 형식과 의미를 노래한다. 맨 앞의 두 시편은 이러하다.

“사막의 모래 파도는 연필 스케치 풍이다 모래 파도는 자주 정지하여 제 흐느낌의 상(像)을 바라본다 모래 파도는 빗살무늬 종종걸음으로 죽은 낙타를 매장한다 모래장(葬)을 견디지 못하여 모래가 토해낸 주검은 모래 파도와 함께 떠다닌다”(<모래장> 앞부분)

“버려둔 시골집의 안채가 결국 무너졌다 개망초가 기어이 웃자랐다 하지만 시멘트 기와는 한 장도 부서지지 않고 고스란히 폴삭 주저앉았다 고스란히라는 말을 펼치니 조용하고 커다랗다 새가 날개를 접은 품새이다 알을 품고 있다”(<지붕> 앞부분)

해설을 쓴 평론가 권혁웅은 이번 시집에 나타난 죽음의 형식을 △현전의 존재론 △존재 변환의 문턱 △문자학 △사랑의 방법론 네 가지로 분류했다. 시인은 “내 시가 때로 상처의 무늬와 겹쳐진 오래된 얼룩이었으면 합니다”라고 자서에 썼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다음달 중에 김언희·조인호 두 시인의 시집으로 이어지며 해마다 20~30권씩 나올 예정이라고 기획을 맡은 김민정 시인은 밝혔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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