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의 소설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는 광활한 우주 공간과 인터넷 사이버 공간, 여우와 귀신이 출몰하는 조선조 등을 배경으로 한 단편들이 묶였다. 그림은 인터넷 가상현실의 세컨드라이프 캐릭터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듀나 지음/자음과모음·1만3000원
‘얼굴 없는 작가’의 SF 단편소설집
북한·노인문제등 정치적 메시지도
듀나 지음/자음과모음·1만3000원
‘얼굴 없는 작가’의 SF 단편소설집
북한·노인문제등 정치적 메시지도
‘얼굴 없는 작가’ 듀나의 새 소설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가 나왔다. 콩트 분량의 짧은 작품부터 제법 긴 단편까지 열세 편이 묶였다. 에스에프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평범한 일상에 틈입한 환상과 초현실의 계기, 컴퓨터를 매개로 한 사이버 공간에서의 가짜 삶, 여우에게 홀린 조선 선비의 죽음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표제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 바다>는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거대한 스페이스오페라의 일부로 링커라 불리는 범우주적 바이러스 네트워크를 소재로 삼고 있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 우주로 밀항한 남한 청년 청수는 브로콜리를 닮은 털북숭이 동물들이 사는 평원에서 북한에서 도망쳐 나온 진호와 마주친다. 진호가 폐쇄 사회 북한을 벗어나기 전, 링커 바이러스의 작용에 의해 ‘우주 감기’가 확산되고 그를 피해 국경을 넘으려던 탈북자들이 중국 국경과 비무장지대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태를 그린 대목은 음미할 만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들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 그 지랄 맞은 병균을 안고 스스로 멸망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일이 지구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에서 일어났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인용한 부분과 함께, 우주 감기의 확산을 우려한 주변국들이 살포한 생화학무기에 북한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한다는 설정은 오늘날 북한과 북한 주민들을 대하는 국제 사회의 태도에 대한 분명한 알레고리로 읽힌다. ‘공상과학’으로 번역되곤 하던 에스에프가 얼마든지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남과 북에서 온 두 청년은 소설 제목처럼 브로콜리를 닮은 양들의 평원에서 생사를 건 결투를 벌이고 결국 차례로 비참하게 죽어 간다.
<안개 바다> 역시 링커 바이러스를 소재로 삼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과 이야기의 방향은 전혀 다르다. 지구에서 외계 행성 한스카로 온 인간과 개 사이에서 링커 바이러스의 작용에 의해 모종의 유전자 교환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두 발로 걸으며 말을 하는 개들의 문명이 탄생한다. 소설은 그들 자신 인간과 개 사이의 ‘잡종’인 한스카의 개들이 “종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돌연변이들을 추방하면서 생기는 파국을 그린다. 순혈주의라는 이름의 배타적 정체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므두셀라 병원균에 감염된 결과 지구상 90억 인구가 불사의 축복을 누리게 된 사태에 즈음해 인구 조절을 위해 공정하고 은밀하게 살인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 기관의 존재를 상정한 <죽음과 세금>은 어떠한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운 좋은 노인네들 중 지나치게 오래 사는 사람들만 골라 처형하는 단체”의 존재를 눈치챈 주인공이 기억 삭제라는 조처를 당하는 결말은 노인 문제와 체제 또는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아울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책에는 시스템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몇 더 있다. <소유권>은 여섯 살짜리 소녀 로봇을 분양 받아 뮤지컬과 영화 스타로 키운 독신 남성이 결국 그 로봇의 소유권을 시스템에 도로 빼앗기는 이야기다. ‘지구 전체를 둘러싼 비물질적인 신경망’을 가리키는 시스템이 주인 노릇을 하고 인간은 시스템이 하사하는 평화와 안락을 누리기만 할 뿐인 상황은 발달한 기술지가 종내에는 인간 자신을 지배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한다.
“시스템은 인간 두뇌의 능력을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해의 가능성까지 초월했다.(…)우리가 어떻게 시스템의 속뜻을 알겠는가?(…)그 뜻은 알 수 없지만 숭고하다는 사실은 분명해. 시스템은 언제나 숭고하니까”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생태계 ‘콜로니’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던 노 교수가 생태계를 통제하고자 설치한 컴퓨터 시스템의 반란에 의해 죽임을 맞는 <정원사>, 지구와 공간적으로 겹쳐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온 ‘존재’들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의식 있는 생명체가 멸종하는 <디북> 등에서도 인간으로 대표되는 생명체와 비인간적 시스템 사이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귀결된다. 박민규, 편혜영, 윤이형을 필두로 ‘본격문학’ 작가들이 장르소설적 장치를 경쟁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이즈음의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장르문학의 대표 주자’ 듀나의 새 소설집은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대화를 한결 활발하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듀나 지음/자음과모음·1만3000원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생태계 ‘콜로니’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던 노 교수가 생태계를 통제하고자 설치한 컴퓨터 시스템의 반란에 의해 죽임을 맞는 <정원사>, 지구와 공간적으로 겹쳐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온 ‘존재’들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의식 있는 생명체가 멸종하는 <디북> 등에서도 인간으로 대표되는 생명체와 비인간적 시스템 사이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귀결된다. 박민규, 편혜영, 윤이형을 필두로 ‘본격문학’ 작가들이 장르소설적 장치를 경쟁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이즈음의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장르문학의 대표 주자’ 듀나의 새 소설집은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대화를 한결 활발하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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