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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얽히고설킨 아리송함…무엇이 진짜일까

등록 2011-02-25 20:23

다니엘 켈만
다니엘 켈만
명예
다니엘 켈만 지음·임정희 옮김/민음사·1만원

독일 작가 다니엘 켈만 단편집
독립적인 듯 이어지는 이야기
독창적인 구성의 묘미가 일품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명예
다니엘 켈만 지음·임정희 옮김/민음사·1만원
명예 다니엘 켈만 지음·임정희 옮김/민음사·1만원
독일 작가 다니엘 켈만(36·사진)의 소설집 <명예>에서 소설가 레오 리히터가 여자친구 엘리자베스에게 하는 말이다. 장주의 호접몽 이야기나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를 떠오르게 하는 이 대사는 또한 얼마 전에 나온 최제훈의 연작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 관한 설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명예>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놀랄 만큼 비슷한 구성 원리를 보인다.

<세계를 재다>와 <나와 카민스키>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켈만의 2009년작 <명예>는 모두 아홉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다. 각각의 단편은 서로 다른 주인공을 등장시켜 독립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것들이 아예 무관한 인물과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에 이 작품의 구성상 묘미가 있다. 가령 첫 작품 <목소리>에서 컴퓨터 기술자 에블링은 휴대전화에 대해 거부감을 지닌 채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개통하는데, 어이없게도 그에게 랄프라는 사람의 번호와 같은 번호가 할당된다. 개통하자마자 랄프를 바꿔 달라는 여자의 전화가 걸려 오는 것을 비롯해, 수신 전화의 대부분은 에블링 자신이 아닌 랄프를 찾는 것들이다. 처음에는 무언가 착오가 있다고 해명도 하고 고객 센터에 항의도 해 보지만, 차츰 스스로 랄프 행세를 하는 데에 재미를 붙인다. “마치 도플갱어, 즉 다른 세계 속에 또 다른 자신이 있어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키가 크고 멋진 여성을 만나고 있는 듯했다.”

에블링에게 잘못 부여된 번호의 원래 주인인 랄프는 <탈출구>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른아홉 살이 되던 해 초여름, 배우 랄프 탄너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느 날인가부터 전화가 오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잘나가는 배우였던 랄프는, 아마도 에블링에게 자신의 전화번호가 돌아간 이후, 친구와 애인들한테서 연락이 끊기고, 유튜브에서 자신의 닮은꼴 배우가 제 흉내를 내는 영상을 본 일을 계기로 스스로 랄프 탄너 흉내를 내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는, 결국 ‘진짜’ 닮은꼴 랄프 탄너에게 자신의 집과 정체성을 모두 빼앗기고 랄프의 닮은꼴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 랄프가 거울을 보며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반사된 모습인지 아리송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이 작품뿐만 아니라 소설집 <명예> 전체의 주제의식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에블링과 랄프에게 이런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라는 작품에 그 답이 있다. 통신회사의 휴대전화 번호 관리 담당인 유부남 팀장이 결혼 사실을 숨긴 채 다른 여자와 몰래 데이트를 즐기느라 양쪽 여자들에게 거짓말을 늘어 놓는 등 어지러운 일상을 꾸려 가다가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

그렇다면 기사 앞머리에서 인용한 대사의 주인이자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비중 있게 등장하는 작가 레오는 이들과 어떻게 연결될까. 통신회사 팀장이 역시 복잡한 이중생활을 영위하느라 제가 가야 할 통신사들 회의에 몰비츠라는 부하 직원을 대신 보낸다. 몰비츠의 이야기는 <토론에 글 올리기>에 나오는데, 인터넷 토론방에 공격적인 글을 올리는 게 취미인 몰비츠는 얼떨결에 팀장 대신 간 회의에서 소설가 레오 리히터와 마주친다. 평소 레오 소설의 광팬인 그는 어떻게든 레오의 눈에 띄어 그의 소설 속 인물이 되고자 하나 레오의 냉담한 반응을 벽처럼 느끼며 물러선다. “난 소설에는 결코 등장하지 못하리라는 걸 이제는 안다”는 게 그를 주인공 삼은 이 소설의 마지막, 반어적인 문장이다.

소설에 등장하기를 극구 꺼린다는 점에서 레오의 연인 엘리자베스는 몰비츠의 대척점에 놓이는 인물이다. 특히 레오 소설의 유명한 여주인공인 라라 가스파드가 어쩐지 자신을 모델로 삼은 듯해 경계하던 엘리자베스가 <위험 속에서>라는 작품에서 바로 그 소설 속 인물 라라와 마주친다는 설정은 재미지다. 앞머리의 레오 대사는 바로 이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라라의 친척 아주머니인 로잘리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에서는 늙은 로잘리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주인공 삼아 소설을 쓰는 작가 ‘나’(그러니까 레오!)와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소설과 현실, 이야기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새롭고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작가의 역량이 눈부시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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